미디어 풍요 속의 빈곤
[아시아경제 백재현 온라인뉴스본부장]
자리에 앉자마자 채팅을 하는 사람, 선채로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며 낄낄 거리는 사람, 핸즈프리로 누군가와 중얼 중얼 통화하는 사람.
요즘 버스나 전철 안 풍경은 미디어 도구들의 전시장이다. 책이나 잡지, 신문을 보는 사람보다 스마트폰, 휴대형 멀티미디어 재생기(PMP), 태블릿PC를 들고 있는 사람이 훨씬 많아졌다. 불과 1~2년 전에 비해 확연히 달라졌다. 젊은 사람들은 숫제 길에서도 모니터에 눈을 꽂고 다닌다. 그만큼 빠르게, 또 다양하게 누군가와 혹은 무엇인가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블로거들이 전통미디어를 겨냥해 '우리가 미디어'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때가 불과 엊그제 같은데 요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전통미디어는 숫제 안줏감이 됐다. 적어도 겉모습만 놓고 보면 이제 '모두가 미디어'인 세상이다.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세상처럼 보인다.
중동 민주화 바람에서 보여진 트위터의 눈부신 활약을 보라. 무명의 시민들이 서슬퍼런 독재의 총칼을 비웃기라도 하듯 생생한 현장 사진을 전 지구를 향해 쏟아내는 모습을 볼 때면 IT기술의 발전에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6월 초 현재 전 세계 페이스북 가입자 수는 무려 7억명에 육박한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커뮤니케이션을 생각해 보라. 또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와 실시간으로 무료 채팅을 해보라. 글자 그대로 ‘멋진 신세계’다.
그런데 어지러울 만큼 빠르게 쏟아지는 미디어 기기들 속에서 정작 사람들은 정보의 풍요, 대화의 풍요를 충분히 느낄까? 혹시 대화에서 소외된다는 느낌이나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는 사람도 함께 늘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보와 대화의 홍수다. 홍수가 나면 정작 먹을 물은 부족한 법이다. 이제 사람들은 보기 싫은 정보나 보지 말아야 할 정보를 스스로 골라 내야 하는 새로운 스트레스에 노출돼 있다. 그러다 보니 아예 처음부터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이는 개인적으로는 정보의 편식을 의미하며, 사회적으로는 갈등의 심화가 우려되는 대목이다.
최근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들이 형성되고 논의되고 결론 내려지는 과정들을 보면 대화의 풍요가 오히려 대화를 가로막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반값 등록금 문제만 해도 그렇다. 들리고 보이는 것은 이해 당사자들의 목소리뿐이다. 이른바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가 공론장에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미디어 수단이 다양해지면 여러 목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왜 당사자들의 목소리만 들릴까? 너무도 많은 곳에서 소리를 내니 웬만한 소리는 묻혀버리기 때문은 아닐까? 빨리 결론을 내야 하는 조급함 때문에 진득한 논의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정보통신의 발달은 불행히도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아무리 기가바이트(GB), 테라바이트(TB) 규모의 정보라도 뜯어보면 결국 '0'과 '1'로 구성돼 있다. 철저히 이분법이다. 이 세계에는 점이지대(漸移地帶)란 존재할 수 없다. 중간은 곧 노이즈여서 골라내야 할 대상이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속에서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은 '0'과 '1'로 수렴되는 편한 길을 택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잃지 않는 일이다. 인간이 기술을 컨트롤 해야지 기술이 인간을 조종하게 해서는 안된다. 되돌아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기술을 발전시켜오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술과의 사투를 숙명처럼 벌여왔다.
차분히 따져보고 평가해서 소화를 시켜가며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 새로운 미디어를 받아들이려는 우리의 성급함 속에서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만든 도구에 의해 우리 스스로가 도구화 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이야 말로 미국의 문화평론가 닐 포스트먼이 한 말을 되새겨 봐야 할 때다.
"우리가 어떤 도구를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 삶에 미치는 도구의 효과를 평가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도구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백재현 온라인뉴스본부장 itbrian@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