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의 비밀을 다루는 드라마들은 대개 출생의 비밀을 밝히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합니다. 엎치락뒤치락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 친부모를 찾게 되고 ‘그리하여 그들은 행복했습니다’라는 식의 엔딩을 맞이하기 마련이죠. 요즘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고 있는 KBS 일일극 <웃어라 동해야>가 바로 그런 드라마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네요. 미국으로 입양되었던 안나(도지원)가 한국으로 돌아와 친부모와 만나기까지 무려 128회, 어언 반년이 넘도록 시청자들은 감격어린 상봉 장면을 목 늘이며 기다려야 했거든요. 그런데 MBC <반짝반짝 빛나는>은 같은 소재임에도 출발부터가 판이하게 다르더군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바로 그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으니까요. 그것도 당사자인 황금란(이유리) 씨 스스로가 병원에서 다른 아이와 뒤바뀌었음을 눈치 채고는 친자확인검사를 마치는 등 홀로 철저히 준비한 끝에 양가에 폭탄선언을 했으니 말이에요. 그런 금란 씨의 영민함과 어느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진취적인 점이 저는 좋았어요. 아마 문제 해결은커녕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휘둘리며 진실로부터 점점 멀어져만 가는 답답한 여주인공들에게 질릴 대로 질려 버렸기 때문인가 봅니다.
드라마가 끝나면 각 가정에서 갑론을박이 일어난답니다
그런데 그 후의 행보에는 아쉬운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무리 결혼을 며칠 앞두고 애인에게 배신을 당했다지만, 또한 수년 간 아버지의 도박 빚으로 인해 이루 말 못할 고초를 당해왔다지만, 순리에 따르지 않는 조급함을 보이는 게 못내 안타깝더라고요.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키워주신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고 돌아선 꼴이 되었으니 그는 더더욱 안타까운 일이고요. 매주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인터넷 게시판은 물론 각 가정마다 갑론을박이 인다는 사실, 혹시 아실는지 모르겠네요. 키워준 정이 우선이다, 천륜이 우선이다, 당장 친부모 댁으로 옮겨 앉고 싶어 했던 금란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남는다, 이해 못하겠다, 금란이 대신 누릴 거 다 누려온 정원(김현주)이가 알아서 집을 나가줘야 옳다는 등,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자칫 싸움이라도 한 판 벌어질 기세더군요.
금란 씨 편에 선 이들은 금란 씨가 그간 대학 진학도 못한 채 가족을 위해 희생해왔던 터라 품새가 좁은 건 당연한 이치라며 안쓰러워들 합니다. 안 해도 될 고생을 했으니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겠느냐, 제 자리에서 성장했다면 얼마든지 너그럽고 여유 자적한 품성을 지녔을 게 아니냐고들 하죠.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가난하다고, 문제를 지닌 가정이라고 아이들이 다 비뚤어질리 있나요. 그렇다면 반대로 돈 많고 명성 있는 부모를 둔 자식들은 죄다 훌륭한 인품을 지녔게요? 설마 그럴 리가 있습니까. 얼마 전 모 재벌가 아들이 음주 운전에 뺑소니로 구속된 거 보셨잖아요. 물론 넉넉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게 최선이긴 하겠지만 돈이 많다고 다 좋은 가정은 아닌 거거든요.
금란 씨, 그 자존심은 다 어디로 갔나요
짐작컨대 사람의 품성은 태생적인 면과 환경적인 면이 반반씩 작용하지 싶어요. 따라서 금란 씨나 정원 씨의 잘잘못은 낳아주신 어머니와 길러주신 어머니, 두 분 모두에게 골고루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금란 씨의 겉으로는 천생 요조숙녀지만 속으론 질투심 많고 남에게 지고는 못 사는 승부욕만 해도 생모(박정수)이신 평창동 어머니를 빼닮은 것 같더군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기다릴 줄 모르는 성급함도, 하다못해 검사라는 직업을 좋아하는 속물근성까지 똑 닮았던 걸요. 보고 있자면 모전여전이란 소리가 절로 나와서 하는 얘기에요. 솔직히 키워주신 어머니(고두심)에겐 그런 허영심 따위는 없잖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지금까지는 태생적이든 환경적이든 부모님의 영향 하에 인격이 형성되었다면 이제는 금란 씨 스스로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 올바른 가치관을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할 단계가 아닐까요? 본의는 아니었지만 이때껏 금란 씨의 자리를 차지하고 삼십년 가까이 살아온 정원 씨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도, 또 그 모든 것을 돌려받고 싶은 심정도 백번 이해가 갑니다. 알고 보면 내 집과 내 부모거늘 집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느니 마니 하는 정원 씨가 어이없고 괘씸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일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정원 씨가 가진 걸 훔치려 들어서야 쓰나요. 저는 적어도 금란 씨가 자존심 하나만은 서릿발 같다고 믿었던 터라 지난 번 기획안이 메모된 정원 씨의 수첩을 훔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건 사람과 사람 사이를 흐트러트리고 끊어 놓는, 인간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는 사실이겠죠. 어머니와 정원 씨 사이를 살금살금 이간질 시키더니 결국엔 집에 들어오는 첫날부터 어머니로 하여금 정원 씨 따귀를 때리게 만들었잖아요. 이미 모든 게 금란 씨의 것이거늘 왜 그리 조급증을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차차 송 편집장(김석훈)을 비롯한 정원 씨의 인간관계 전부를 끊어 놓으려고 들 금란 씨가 걱정이 되는군요. 자신이 저지른 온갖 악행은 부메랑이 되어 스스로에게 고스란히 돌아오는 법이라는 거, 부디 잊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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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10 아시아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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