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과기대에서 강의하는 박찬모 전 포스텍 총장 단독 인터뷰
[아시아경제 김동원 선임기자]"북한 대학생들이 삼성 노트북을 사용하며 강의를 듣고 있는 모습이 상상이 됩니까?"
남북한 최초의 합작대학인 '평양과학기술대학(PUST)’에서 북한 학생들을 가르치다 일시 귀국한 박찬모 전 포스텍(포항공대) 총장을 30일 만났다. 박 전 총장의 목소리에는 아이같은 설렘과 묘한 떨림이 동시에 묻어났다.
박 전 총장은 “금단(禁斷)의 땅, 평양 한복판에서 북한 최고의 수재급 학생들에게 정보통신기술(ICT)의 미래에 대해 강의하면서, 그들과 소통하고 의견을 나누다보면 격변하는 역사의 현장에 서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강의시간에 정보통신공학부 학생들은 주로 중국산 델 노트북을 사용한다”면서 “다만 농생명공학부에서는 델 노트북 대신 중국산 삼성 노트북을 활용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평양과기대 챈슬러(명예총장)로서 강의교수도 겸하고 있는 그는 2003년부터 4년간 포스텍(포항공대) 총장을 지낸 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과학기술특보, 초대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박 전 총장은 “평양과기대 학생들은 김일성종합대와 김책공대 등에서 선발된 최고 수준의 인재들로 포스텍 KAIST 등 국내 명문대 중에서도 톱 클래스 수준이라고 보면 틀림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지난해 10월 개교한 평양과기대의 학생은 현재 대학원(북한에서는 박사원이라고 부른다)생 60명을 포함해 모두 160명이며, 조만간 대학원 본과 과정 100명이 추가 입학할 예정이다. 평양시 남단(행정구역상 낙랑구역 보성리 승리동) 100만㎡의 부지에 자리잡은 평양과기대는 북한내 특구 가운데 특구로 꼽힌다.
정보접근이 철저히 차단된 북한이지만 교수들은 평양과기대내 교수 숙소에서만큼은 미국의 CNN방송도 시청할 수 있다. 교수들은 전원 외국인으로 북한 교수는 단 한명도 없다.
박 전 총장은 평양과기대를 “북한과 서방세계를 잇는 가교(架橋)”라고 표현하면서 “PUST가 향후 북한의 변화를 이끄는 지렛대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 전 총장은 평양과기대가 문을 연 것 자체가 북한의 변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평양과기대의 2020년 미래비전 캐치프레이즈가 바로 ‘상상을 뛰어넘는 글로벌 대학(A Global University beyond Imagination)’이라며 ‘PUST 역할론’을 강조했다.
국내 명문대생들을 두루 가르쳐봤는데 평양과기대생들과 어떤 차이를 느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남북한의 환경이 너무나 달라 마치 사과와 배를 비교하는 것 처럼 직접 비교는 어렵다”고 전제하면서 “다만 이론적인 것이나 수학 등 기초학문 분야에서는 북한 학생이 우수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며, 실습이나 응용 면에서는 첨단 실험기기 등을 두루 갖춘 한국이 아무래도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평양과기대 교수진은 30여명으로 미국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 중국 출신 등 모두 외국인이다. 정작 북한 교수는 한명도 없다. 박 전 총장이 외국인 교수의 일원으로 평양과기대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미국 국적을 갖고 있기에 가능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현재 수업을 듣고 있는 160명의 학생 가운데 여학생이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물론 평양과기대가 금녀구역은 아닌 만큼 앞으로 입학생 중에는 여학생들도 포함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박 전 총장은 “강의시간에는 영어만 사용한다는 것이 PUST의 절대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강의시간 외에도 가급적 북한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평양과기대의 ‘3무(無)’는 아마도 북한교수, 여학생, 북한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영어는 기술영어 전공영어로 나눠 가르친다”며 “봄 학기부터 모의실험(시뮬레이션) 전공과목을 가르칠 예정이며, MIT출신의 웨슬리 브루어교수의 경우 리눅스 운영체계를 담당하는 등 교수별로 강의 주제가 세분화돼 있다”고 소개했다.
평양과기대는 '정보통신공학부' '농생명공학부' '경영학부' 등 3개 학부로 구성돼 있다. PUST 학생들은 모두 노트북을 한 대씩 대여받아 사용한다. 물론 학생들의 학자금 숙식비 교과서 등도 모두 무상으로 제공된다.
박 전 총장은 “학교측에서 노트북을 학생들에게 지급하면 위법이 되므로 빌려주는 것이며, 학생들은 노트북을 지니고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전했다. 또한 북한의 전력사정이 좋지 않아 갑작스런 정전으로부터 빔프로젝터 등 전기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해 UPS(무정전 전원장치)를 조만간 도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교수들은 교내에서는 인터넷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지만 학생들은 별도 규정에 의해 어느 정도 제한을 받게 된다. 박 전 총장은 “북한내 인터넷 속도는 다소 느리지만 평양과기대가 북한에서 캠퍼스에 인터넷이 개통된 첫 사례라는 점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북한에서는 ‘광명망’이라고 불리는 인트라넷만 운영돼왔다.
기존의 인트라넷은 외부세계와는 접속이 되지 않고, 북한이 자체적으로 구축한 광명 포털이나 광명 이메일 시스템 등에만 접속되는 북한 내부용 통신망을 뜻한다. 따라서 인트라넷으로는 네이버나 구글 같은 포털에 접속해 자유롭게 검색을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박 전 총장은 평양과기대내의 학습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일화도 소개했다. 영어담당 외국인교수가 강의도중 작은 실수를 했는데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그것을 지적했다고 한다. 그러자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교수가 “아임 소리, 마이 미스테이크(I’m sorry, my mistake.)”라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는데, 학생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깜짝 놀라더라는 것이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북한에서는 놀라움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해당 외국인 교수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한 학생을 오히려 칭찬해줬고, 그러자 학생들의 사기가 올라가 수업 분위기가 한층 활기를 띠게 됐다는 얘기다.
박 전 총장은 지난해 11월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한바탕 난리가 났던 당일에도 평양에 있었다. 박 전 총장은 “당시 그 같은 엄청난 일이 발생했지만 바깥세상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그나마 평양과기대 교수 아파트 내에 설치된 중국TV방송을 통해 연평도 사태가 발발한 것을 알았으며, 다른 외국인 교수들은 뒤늦게 그 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놀라기도 했다”면서 “그 일이 있은 뒤 북측에 이같은 문제점과 어려움을 호소해 교수들은 특별히 CNN 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다만 교수 숙소에서만 CNN방송을 볼 수 있어 학생들이 CNN방송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평양과기대 운영 자금과 관련, “학교 재원은 전적으로 기독교단체나 교인 등 외부 독지가들에 의존하고 있다”면서 “교내에 슈퍼마켓이나 커피숍을 운영하기도 하며, 학생들에게는 일정 금액을 넣은 전자카드를 지급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미국 시카고에 본부를 둔 YPF(연변과기대-평양과기대 재단)에서 열심히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도 곁들였다. 특히 지난해 12월에는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의 아들 일행이 직접 평양과기대를 방문하는 등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다고 전했다.
박 전 총장은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노동당 행정부장)의 경우 예전에 포항에서 만난 경험이 있어 면담 요청을 해놓은 상태”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그가 포항공대 총장 대행 시절인 2002년에 장성택 부위원장 등 북한경제시찰단 10여명이 포항공대를 방문했을 때 직접 안내를 맡은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박 전 총장은 4월초 다시 평양에 들어가 본격적인 봄학기 강의에 나설 계획이다.
김동원 IT선임기자 dw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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