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소녀에서부터 유명 아이돌 가수, 대기업 임직원까지 SBS <싸인>의 희생자는 넓고도 깊다. 그리고 부검대 위에 놓인 이들의 몸이 지훈(박신양)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순간, 대한민국의 어둡고 축축한 검은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부검실에만 있을 수 없었다. 훼손된 현장을 복구하기 위해 사건현장을 직접 뛰고, 경찰 못지않게 주변 정황을 살피며 진짜 얼굴에 한걸음씩 다가갔다. 숨겨진 진실의 거대권력에 맞서는 일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만큼이나 고통스럽지만 그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의 용기는 TV 너머의 시청자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이제 남은 시간은 단 120분. 지훈의 메스는,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서윤형 케이스’로 무엇을 얘기할 것인가. 김선영, 조지영 두 TV 평론가가 부검실에 뛰어들었다. /편집자주
SBS <싸인>에서 죽음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죽은 자를 애도하고 기억하거나 아니면 침묵과 망각 속에 매장하거나. 죽은 자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지훈(박신양)이 전자를 대변한다면, “죽은 사람들은 잊혀지게 마련”이라며 침묵과 망각의 편에 서는 명한(전광렬)은 후자에 속한다. 후자는 갈수록 전자를 위협한다. 죽음은 점점 더 빠르게 잊혀지고 불충분한 애도는 무감각증과 마비를 낳는다. <싸인>에서 도처에 출몰하는 사이코패스들과 만연한 폭력 살인은 그 애도 불능의 시대가 낳은 병리적 증후다.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로 이루어진 애도의 서사
AD
그리하여 <싸인>의 부검은 단지 사인을 밝히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애도의 과정처럼 묘사된다. 8회 일본 로케이션 에피소드는 그 단적인 예다. 오래된 백골 사체의 부검 과정에서 밝혀지는 것은 사인 외에 한 소녀의 안타까운 사랑과 전쟁의 비극이다. 그녀가 순정을 바친 소년은 평생 그 사실을 모른 채 살다가 백발노인이 되어서야 기억 속에서 소녀와 대면하게 되고, 그 무명의 죽음은 그제야 사랑하는 이의 애도와 함께 안식을 얻는다. 아키짱의 묘 앞에서 추도하며 “우리가 하는 일은 단순히 사인만을 밝히는 게 아니라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을 지켜주는 것”이라 말하는 다경(김아중)의 신념은 ‘부검은 죽은 자의 유언을 들어주는 것’이라는 지훈의 가치관과 함께 <싸인>이 그려내는 애도의 서사의 중추가 된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부검 신 못지않게 산 자가 죽은 이의 시신 혹은 묘 앞에서 말을 거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며, 그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남긴 “구구절절한 사연”은 때로 살아남은 자들의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싸인>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로 이루어지는 애도의 드라마다.하지만 애도가 지닌 더 중요한 의미는 이 작품의 사회적 주제의식과 관련이 있다. <싸인>은 핵심 플롯인 서윤형(건일) 살인 사건을 통해서 권력이 강요하는 망각과 그에 맞서는 애도의 저항적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한 사람이 거대 권력의 비호를 받는 자에게 살해됐고 그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강제로 침묵 당했다. 장항준 감독은 이 부검 조작 모티브를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에서 끌어왔다. 서윤형의 사인이 조작되고 증거와 증인들이 차례대로 제거되는 모습은, 불리한 기억과 증언을 삭제하며 강요된 망각 속에서 진실을 은폐해왔던 ‘이 땅의 권력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는 저 유명한 말은 여기에 너무도 잘 들어맞는다. 그러므로 바꾸어 말하면 진실의 동의어는 기억이다. 따라서 죽음을 잊지 않고 애도를 완성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살아남은 자들이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저항의 힘을 갖는다.
기억함으로써 강요된 망각에 저항하다
권력은 계속해서 진실을 은폐하지만 매장당한 진실은 어느 순간 반드시 유령으로 돌아오거나 백골 사체로 출몰하며 산 자에게 ‘싸인’을 남긴다. 그 ‘싸인’은 때로 다경이 끝까지 지키려 한 섬유샘플처럼 가느다랗고 연약하기만 하다. 하지만 잊지 않는 자들은 그 미세한 진실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지훈의 대사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한 미군 총기 사건 에피소드에서 잘 나타나듯이 지훈과 다경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에 권력이 지운 진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억압과 폭력의 발혈점인 부당 권력의 실체에 다가가는 동안 <싸인>의 사회적 메시지는 점점 단호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우진(엄지원)의 대사를 통해 묻는다. 추도의 촛불조차 가로막는 이 애도 불가능의 시대에 망각의 동참인이자 역사의 방관자였던 이들 모두에게. “그 역사 이젠 바꿀 때가 되지 않았나요?” 그리고 힘주어 말한다. 권력에 유린당하고 자살했던 한 여배우의 편지처럼, 억울한 모든 죽음이 남긴 ‘싸인’의 수신인인 우리 모두에게. 잊지 말고 애도하라고. 기억하는 한 죽은 자는 계속해서 부활한다고. 한국 드라마사에 잊지 못할 강렬한 메시지가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글 김선영
SBS <싸인> 2회, 법의관 윤지훈(박신양)은 신참 고다경(김아중)에게 버럭버럭 독설을 퍼붓는다. “세상 물정 모르고 집에서 < CSI > 같은 드라마 보고 멋있겠다 싶어서 설치고 깝치는 부류들 구역질 나고 토할 것 같아!” 베테랑 검시관 정문수(윤주상)는 30년 검시관 생활을 자조하면서, 한국의 한참 열악하고 고생스러운 ‘과학 수사’의 현실을 털어놓는다. <싸인>은 과연, < CSI > 시리즈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신기술도, 대규모 액션신도 없었다. 그러나 <싸인>은 죽은 자의 마지막 유언이 왜 그렇게 세상에 전해지기 어려운가에 대해, 산 자가 말하는 거짓말이 어떻게 세상을 파괴하고 있는지에 대해 집요하게 묻고 또 묻는다.지금, 여기 한국사회를 정조준하는 질문
죽은 자가 말하는 진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불편함, 그것은 죽고 사는 문제를 떠난 진실의 속성이다.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의 불편함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진실을 오픈하는 것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일인가? 하는 질문에는 항상 머뭇거릴 수 밖에 없다. 가령 4회, 여관방 자살 케이스가 그렇다. 고다경이 ‘그냥 타살이라고 해주면 안되요?’ 라고 말했던 것은, 고다경이 가난한 가장이었던 망자의 뜻을 헤아렸기 때문인데, 이런 ‘착한’ 명분이 있을 때에는 부검 소견을 사실 그대로 쓰기가 쉽지 않다. 혹은 정황상 살인자가 명백한대도 사체가 죽은 시간은 용의자가 범인이 아니라고 말할 때, 그를 풀어주면 또 살인을 저지를 것이 분명한대도 용의자를 붙잡을 명분이 없을 때는 어쩔 것인가? 그런가 하면 ‘한번 만’ 부검 결과를 조작하면 국과수에 무려 지원금이 500억이 할당된다면? 혹은 그 보다 더 강력한 지원과 권력을 갖게 된다면? 이미 죽은 사람, 그 사람이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죽음의 원인이, 죽어간 시간대가 뭐가 그리 중요하다는 말인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열악한 환경개선이 우선이지 않은가? 이명한(전광렬)은 이 질문에 망설임없이 답한다. 그는 입만 열면 모든 것이 ‘국과수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 말이 거짓도 아닌 것 같다.문제는, 어떤 명분도 죽어간 사람의 진실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예외케이스(즉, 부검결과 조작)가 한 번 발생하면 두 번, 세 번째 조작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조작된 진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제 2의, 제 3의 범죄를 부른다. 평생을 청빈하고 꼿꼿하게 국과수의 역사를 써나간 정병도(송재호) 마저 단 한번의 과오로 제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다. ‘이번 한번만’이라는 유혹은 그만큼 집요하다. 과거의 망령은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 ‘이번 한번만’을 요구했던 세력은 그 한번을 목줄 삼아 더 큰 조작을 종용한다. 이명한은 그 굴레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 것인가? 윤지훈과 고다경은, 정우진(엄지원)과 최이한(정겨운)은 그 무수한 유혹과 회유의 덫을 끝내 피해갈 수 있을까? <싸인>은 이렇게 쉴 틈 없이 질문을 던진다. 생각을 멈춰야 보기 편한 드라마의 홍수 속에서, <싸인>의 질문은 한 없이 괴롭고 또 슬프다. 질문이 지금, 여기 한국 사회를 정조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서윤형 케이스를 다시 깨운다
드라마의 흥미를 끌기 위한 다분히 충격적인 오프닝처럼 보였던 ‘서윤형 케이스’는 실상, <싸인>의 핵심 요약판이었다. 엉망이었던 초동수사, 서로 이익을 챙기기에 바빴던 세력들, 거짓말을 덮기 위한 거짓말, 두려움과 비겁함이 손잡은 거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던 외압 그 모든 것이 합쳐진 우리 안의 괴물이 바로, 서윤형 케이스에 집약되어있다. 모든 등장인물은 이 케이스의 시험을 받는다. 첫시험에서 미끄러진 주인공들은 재시험을, 또 재시험을 치루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억울한 희생자는 계속 생겨난다. 범인을 놓치면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하다. 부제가 있다면 ‘애타게 증거를 찾아서’로 명명될, 서윤형 케이스는 드라마 <싸인>의, 그리고 한국 사회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뒤늦게 망자의 유언을 제대로 세상에 전하려는 노력은 처절하고 숨가쁘다. 망자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진다. 그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든다. 다행히 윤지훈과 고다경, 정우진과 최이한은 포기를 모른다. 물론, 드라마 안이나 밖이나 진실의 은폐를 주도하는 ‘강서연들’은 힘이 세다. 그러나 <싸인>이 뚝심 있게 전하고자 했던 진실은, 그래도 세상은 망자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달라져왔다는, 당연하고도 상식적인 메시지가 아닐까.
글 조지영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 아시아 글. 김선영(TV평론가)
10 아시아 글. 조지영(TV평론가)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