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0월19일 뉴욕 증권시장. 문을 열자 '팔자' 주문이 쏟아졌다. 월가는 패닉에 빠졌고 주가는 하루 동안 22.6%가 곤두박질쳤다. 그 유명한 '블랙 먼데이'다. 이를 미리 내다본 사람이 있었다. 월가의 투자전략가 마크 파버다. 그는 대폭락을 예견하고 보유주식을 현금화하라고 소리쳤다. 그 후 파버에게 닥터 둠(Dr.Doom)이라는 음습한 별명이 붙었다. 경제비관론자를 뜻하는 '닥터 둠'이란 말은 그렇게 탄생했다.
2006년 또 한 명의 탁월한 닥터 둠이 등장했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세미나에서 주택시장 버블 붕괴, 금융기관 파산, 대기업 국유화 등 미국 경제의 12단계 붕괴론을 제시했다. 그의 예언은 미국 경제의 '운명'인 듯 하나씩 현실로 다가왔다.
비극적 운명론은 불길한 기운이 넘실댈 때 빛을 발한다. 2008년 금융위기는 닥터 둠들의 성가를 드높였고 2009년 다보스 포럼에서 절정을 이뤘다. 그들의 비관론은 회의장을 압도했다. 루비니 교수는 "세계 경제가 침체를 넘어서 불황에 들어설 것"이라 선언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펠프스 콜롬비아대 교수는 "세계 경제는 L자형 장기침체에 빠질 것"이라 진단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0년의 다보스 포럼. 닥터 둠들은 더 이상 무대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비관적 예측이 빗나간 결과다. 루비니가 14% 추락을 전망했던 2009년 중국의 성장률은 8%를 넘어섰다. 그뿐 아니다. 주택시장 폭락을 예견해 온 그가 뉴욕의 550만달러짜리 고급 아파트를 사들였다. 시장에서는 그가 부동산 시장의 전망을 바꿨다며 수근댔다.
실패한 예언가 루비니는 퇴장했을까. 아니다. 건재하다. 더블 딥 위험은 소멸됐다 말하고, 양적완화를 적극 옹호한다. 닥터 둠이라 부르면 '닥터 리얼리스트(현실주의자)'라 받아친다. 반대편의 낙관론자들도 여전히 그와의 논쟁을 즐긴다. 그의 어긋난 예언을 제물로 삼지 않는다. 비관론자와 낙관론자는 적이 아니라 동지다.
닥터 둠의 전성기인 금융위기 때 쓰여진 한 권의 책이 한국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다. '그들'은 '자유시장주의자'들이다. 장 교수는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가리켜 '가장 나쁜 시스템'이라 몰아세운다.
제목부터 논쟁 유발적인 그의 책은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보수, 진보 양쪽에서 함께 공격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급기야 지난주 전국경제인연합회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에서는 조목 조목 문제를 제기하는 보고서까지 내놨다. 학자의 개인적 소견에 연구기관이 정색하고 덤벼들다니…. 하지만 한경련의 목표가 '자유시장경제 창달'임을 안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자유시장을 정조준한 '경제이론에 무지'(한경련)한 경제학자를 어찌 용서할 수 있으랴.
나 또한 '23가지'에 의심이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장 교수를 옹호한다. 빼어난 글솜씨나 뚜렷한 소신 때문만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다양한 얼굴에서 시장경제 한 대목을 쑥 뽑아내 비수를 들이댄 장하준 같은 삐딱한 학자 한 명쯤 자본주의를 위해서도 필요한 게 아닌가. 벼슬을 탐하고, 논문을 베끼고, 교재나 만드는 한국의 저명한 경제학자들보다 백 배는 낫다.
한경련도 잘했다. 논쟁은 생각과 시야를 넓힌다. 더 나아가 '장하준이 말하지 않는 46가지'가 나오기를 고대한다.
그래도 '장하준의 책'이 뭔가 불만스럽다면 한 가지만 덧 붙이겠다. '생각을 일으키는 책. 설사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읽을 가치가 있다.' (폴 크루그먼의 '불황의 경제학'에 대한 로이터의 서평)
박명훈 주필 pm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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