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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칼럼]MB왕국의 물가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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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칼럼]MB왕국의 물가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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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민경제대책회의. 이명박 대통령이 회의 말미에 주유소 기름 값을 놓고 "묘하다"고 말했다. '묘하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비정상이다, 상식과 다르다는 뜻이다. 국내 기름 값이 14주째 오르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러니 이 대통령이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 눈치 빠른 각료들이 그 흉중을 헤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루 뒤인 14일. 주요 부처 물가담당자들이 모였다. 임종룡 기획재정부 제1차관이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휘발유 값 대책을 반드시 강구하겠다." 즉각 석유가격의 적정성 검토를 위한 특별 태스크포스(TF)가 구성됐다. 공정위는 100여명의 요원을 투입, 현장조사에 들어갔다.

다시 하루가 지난 15일. 도로공사가 전국 고속도로 주유소의 휘발유와 경유 값을 ℓ당 20원씩 자율 인하한다고 발표했다. '자율 인하'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고속도로 기름 값 기사가 인터넷에 뜨자 댓글이 이어졌다. "전세 값, 무ㆍ배추 값도 묘하다." "지금까지 손 놓고 있다가 대통령 한마디에 기름 값 잡겠다고? 직무유기 아닌가." "장난이냐, 200원은 내려야지."


때아닌 기름 값 소동을 보면서 궁금증이 일었다. 반드시 마련하겠다는 대책이 뭘까. 대단한 묘수라도 있나. 또 하나. 남대문시장을 찾은 대통령의 사진을 본 적은 있지만 주유소 들렸다는 얘기는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오가다 주유소 가격표를 봤어도 장관들이 대통령보다 훨씬 더 많이 봤을 터다. 그런데 왜 대통령의 '묘하다' 한마디에 장관들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화들짝 놀랐을까. 확인된 사실도 있다. 대통령 말씀의 여전한 위력이다. 행정부 안에 아직 다리를 저는 오리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징표다.

기름 값 논란은 '물가와의 전쟁'에서 불거진 국지전일 뿐이다. 전쟁은 대통령의 입에서 비롯됐다. "물가와의 전쟁이라는 생각으로 물가 억제를 위해 노력하라." 이 대통령은 지난 4일 새해 첫 국무회의에서 물가를 향해 선전포고했고, 각료들은 즉각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갓 장관급 자리에 오른 신참 공정거래위원장이 최선봉에 섰다. 그는 30년간 나부끼던 '경쟁촉진'이란 깃발을 내리고 '물가기관'이라는 새 깃발을 내걸었다. 물가감시 특별대책반도 만들었다. 공정위 전투요원들에게는 "공정위가 물가기관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직원은 인사 조치하겠다"고 일갈했다. 전직 공정위 간부는 이를 보고 "시장경제의 재앙"이라 평했다.


지난 13일 7개 부처 장관이 종합물가대책을 발표한 자리는 물가와의 일전에 나서는 엄숙한 출정식이었다. 공공요금 동결, 등록금 억제, 유통구조 개선과 같은 단골 세트메뉴가 쏟아졌다. 어리버리하던 장수들도 달라졌다. 현관에 '물가안정'이라 크게 써 붙인 한국은행의 수장이 그 하나다. 연초만 해도 '견조한 성장'과 '물가안정 기조'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그가 돌연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전장에 뛰어들었다. 급기야 시장에서도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콩 값이 뛰었다며 두부 값을 올렸던 업체들이 도로 값을 내린 것이다. 묘한 일이다.


물가의 경고음이 나온 지는 오래다. 나라 밖도 소란스러웠다. 정부는 계속 못 들은 체 했다. 배추파동이 그랬고 전세 대란, 기름 값도 그랬다. 물가의 공세는 갈수록 거세졌다. 서민 가계는 벌써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전쟁을 선언한 뒤에야 비로소 왕국의 전사들처럼 전장으로 돌진한다. 스마트 시대라지만 신무기도, 치밀한 준비도, 전략도 없다. 때리고, 눌러서 잡겠다는 투지만이 빛날 뿐. 개전 20일, 승전보는 들려오지 않는다.






박명훈 주필 pm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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