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효진 기자]처음 이 사건에 대한 법관의 판단을 들었을 때 기자는 귀를 의심했다. 법의 잣대를 엄격히 적용해야 할 판사가 법리가 아닌 '배려'로 재판을 진행하는 게 과연 가능할 지 의구심이 생겨서였다. 1930년 미국 뉴욕 치안법원에서 빵을 훔친 노인에게 벌금 10달러를 선고하면서 "굶주린 손녀를 먹이려 늙은 할머니가 빵을 훔치게 한 이 비정한 도시의 시민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방청객들에게서 50센트씩을 걷어 벌금을 대신 내게 한 라과디아 판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법정에 선 사람이 힘없는 노인이 아니라 아직 판단능력이 부족한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이 다를 뿐이었다. 고등학생 2명이 법정에 서게된 사연은 이렇다.
지난해 2월 경기도 고양시의 한 중학교 졸업식 때 후배들을 축하해주겠다며 교복을 찢고 맨살에 밀가루 등 이물질을 뿌린 뒤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유포해 이른바 '알몸 뒤풀이' 논란을 불러일으킨 고교생 A군 등 두 명. 이들은 경찰 수사 끝에 공동폭행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다. A군 등이 의정부지법 5호 법정에 선 것은 지난 19일 오후 2시30분이었다. 언뜻 들으면 무시무시한 혐의로 법정에 선 A군 등은 이날 열린 심리에서 판사로부터 신문이나 추궁을 당하지 않고 이런 얘기를 들었다.
"형사재판 방청하고 소감문 써 오세요. 청소년 참여법정 참여인단으로도 계속 활동하셔야 됩니다. 피해자들 생각하면서 사과편지도 쓰시고요…"
학부모들이 자녀교육에 참고해도 좋을 만한 과제들을 법대 위에서 내린 사람은 의정부지법 소년부 김용태(37) 판사다. 아직 어린 A군 등에게 시급한 건 엄격한 법의 잣대가 아닌 '배려'와 '관심'의 손길이라고 판단한 김 판사는 사건이 접수된 뒤 재판을 청소년 참여법정 형태로 진행키로 했다. 김 판사는 A군 등이 별다른 비행 전력이 없는 점, 재판에 회부된 뒤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이유로 청소년 참여법정을 택했다.
청소년 참여법정은 교육청에서 추천받은 중학교 3학년~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로 구성된 참여인단이 법원 심리에 앞서 적합한 과제를 선정해 건의하고 법원이 사안의 특성을 고려해 본격 심리에 앞서 선별된 과제를 부여하는 재판 형식이다. 재판에 넘겨진 학생이 과제를 잘 이행하고 충분히 반성했다고 판단되면 법원은 더 이상 심리를 안 하고 사건을 종결한다. 반대로 과제를 잘 이행하지 않고 반성하는 기미도 안 보이면 재판은 계속돼 원칙에 따라 처벌이 내려진다.
김 판사가 이날 법정에서 부여한 과제는 ▲일기장(사과편지ㆍ독후감) 작성하기 ▲청소년 참여법정 참여인단에 참여하기 ▲형사법정 방청 뒤 소감문 쓰기 ▲건전한 졸업식 문화를 만들기 위한 소감문 쓰기 ▲가족관계 활성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비행예방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등 모두 여섯 개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를 당사자가 직접 깨닫고 그 잘못이 얼마나 큰 처벌로 이어질 수 있는 지를 느끼게 하려는 게 이 과제의 초점이다. 중ㆍ고교 졸업식 문화를 누구보다 잘 아는 중ㆍ고교생들이 대안을 직접 찾아보게 하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다.
김 판사는 "가해 학생들이 잘못을 스스로 되돌아보고 준법의식을 갖도록 함과 동시에 경각심을 느끼게 하는 게 과제의 취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졸업식 문화를 잘 아는 학생들이 그들의 시각에서 직접 문제를 진단하면 스스로 바람직한 졸업식 문화를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라면서 "아직 어린 청소년들인 만큼 처벌보다는 교육적인 측면에 무게를 두는 게 청소년 참여법정의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김효진 기자 hjn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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