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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DNA]차입·혈연·로열티·사옥 없는 '4無 경영'…오직 낙농 외길

창업주 DNA서 찾는다 <18> 남양유업 홍두영 회장


배곯는 아기들·축산농가 살리기 열정 1964년 창업
50년 '셋방살이'-곁눈질 안한 청렴·검소한 기업인


[아시아경제 조강욱 기자] "기업하는 사람은 기업만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이 곧 애국입니다."


우리나라 낙농산업의 선구자인 남양유업 창업주 고 홍두영 명예회장의 말이다. 이 같은 창업주의 경영철학 때문일까?. 남양유업에는 없는 것이 많다. 은행빚이 하나도 없고 오너의 친인척이 회사에 없으며 외국에 로열티를 지출하는 품목도 없다. 또 자기 사옥도 없다. 무차입ㆍ무혈연ㆍ무로열티ㆍ무사옥의 4무(無) 경영은 홍 회장의 알짜 경영원칙의 네 가지 핵심으로 지금도 남양유업 경영의 근간이 되고 있다.

그는 남양유업을 초우량ㆍ무차입 기업으로 만들면서도 생산설비와 연구개발(R&D)에 집중해 내실을 다지는 것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먹을 것 없어 시작한 분유사업


홍 회장은 1925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학 불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영변으로 돌아와 숭덕여자중학교에서 한때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교사 생활을 하던 1947년 5월 같은 영변 출신의 10살 아래인 지송죽씨와 결혼, 가정을 꾸렸다. 1951년 1ㆍ4 후퇴 때 월남, 1954년 부산에서 비료 수입회사인 남양상사를 설립해 운영했다. 회사는 안정적으로 성장하며 우리나라 최대의 비료회사로 성장하던 중 1962년 화폐개혁이 실시되면서 사업이 난항을 겪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그 동안 고인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됐다. 고인은 비료 사업을 하던 중에도 늘 전쟁 이후 피폐해진 국가 경제로 인해 아기들에게 제대로 먹일 것이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던 중 1963년 해외 출장길에서 선진국의 분유사업을 보게 된 것. 귀국한 고인은 사업을 위한 준비기간을 거쳐 1964년 3월 13일 마침내 남양유업을 설립했다. 축산업 진흥을 통해 가난한 농촌 경제를 살려보자는 생각도 간절했다. 당시 분유는 아기가 허약해 보이거나 아플 때 조금씩 먹일 정도로 귀해 '금유(金乳)'라 불릴 정도였다.


1965년 11월 충남 천안에 제 1공장을 준공한 홍 회장은 1967년 1월 10일 드디어 역사적인 첫 분유를 출시했다. 당시 출시된 '남양분유'는 소위 말하는 대박을 터뜨리며 남양유업의 성장을 견인했다. 홍 회장은 이어 1977년 유산균 발효유인 '남양요구르트'를 개발, 또 하나의 히트 브랜드로 만들며 지속적으로 회사를 성장시켜 나갔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던 1억 원으로 축구선수 차범근을 광고모델로 기용하기도 했다. 1978년에는 유업계 최초로 기업을 공개하고 주식을 상장했다.


◆청렴한 한 우물 정신 끝까지 지켜나가


홍 회장은 언제나 기업인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홍 명예회장의 이러한 경영 방식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지난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때다. 수많은 회사들이 부도와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하고 있을 때 남양유업은 오히려 20% 이상 성장을 일궈냈다. 당시 은행에 남아있던 180억 원의 차입금을 모두 갚아 버리면서 국내 최초로 '무차입 경영'을 선언하기도 했다.


특히 홍 명예회장의 경영스타일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남양유업의 사옥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창업 이후 50여년 간 남양유업은 제대로 된 사옥을 가진 적이 없었다. 지금도 서울 중구의 대일빌딩에 세들어 살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 세계 최고 수준의 시설을 갖춘 공장을 2곳(천안, 나주) 이나 새로 준공하는 등 생산, 설비 투자에는 아낌없는 투자를 하면서도 정작 본사 건물은 없는 것이다. 이는 생산설비 등 제품개발 등에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낭비를 철저히 배격한다는 고인의 철학 때문이다.


직원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김웅 남양유업 대표는 "기념사 때마다 직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수십 번씩 하셨다"고 말했다. 또 직원들이 "자녀 등록금을 지원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 홍 회장은 "오히려 회사를 오래 다녀줘서 내가 더 고맙다"며 손을 꼭 잡았다는 일화는 이 회사 고참 직원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다.


◆문어발 확장 없는 내실경영


다른 기업들이 성장과 동시에 문어발 확장을 시도할 때도 남양유업은 실속경영을 추구했다. 작지만 탄탄한 기업으로 내실을 다지며 제품의 다양화는 추진하지만 사업의 다각화는 철저하게 배제했다. 회사가 이익을 거듭 내자 분유캔을 만드는 회사나 사료공장 등을 세우자는 내부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남양유업은 전공을 벗어난 사업에는 눈을 주지 않았다. 식품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되기까지는 절대 한눈을 팔지 않겠다는 창업주의 철학때문이었다.


200여 가지의 제품을 생산하는 남양유업의 제품은 불가리스와 아기사랑, 아인슈타인우유, 이오, 프렌치카페, 알로에생 등으로 시장에서 1등하는 장수상품, 효자상품이 대다수다. 분유시장과 이유식시장에서 60%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보일 정도.제품의 흥망성쇠가 빈번한 유가공업계에서 남양은 출시하는 제품의 20~30%를 1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히트상품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제품기획부터 브랜드전략, 생산기술, 품질력, 마케팅, 고객관리 등 전과정에 걸쳐 장수하는 히트상품을 만들기 위해 고심한다.


남양유업은 고객과의 교감을 특히 중시한다. 식품회사는 고객의 반응과 평가가 생명이라고 판단, 고객의 불만이나 건의사항 모집에 적극적이다. 일례로 남양유업이 보다 많은 고객의 목소리를 포착하기 위해 만든 '남양아이'라는 육아 포털사이트는 육아를 둔 주부들 사이에 인기 사이트로 자리잡았다.


◆남양유업 식품업계 '1조클럽' 가입


남양유업은 2009년 식품업계에서 10번째로 매출 1조원을 넘어섰다. 홍 회장은 남양유업이 1조원을 달성한 이듬해인 2010년 2월 세상을 떠났다. 남양유업은 그의 가르침대로 다른 사업으로의 확장이나 합병을 통해서가 아닌 오로지 유업과 먹을거리에만 매진해 단일 기업으로 매출 1조원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홍 회장은 '맛있는 우유 GT' '불가리스' 등 수많은 제품을 히트시키며 남양유업을 전국 5개 공장과 중앙연구소, 17개 지점에 1500개의 대리점, 30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국내 대표 식품기업으로 키웠다. 투철한 장인정신과 정직한 기업정신으로 한국 낙농산업의 기반을 닦는 데 평생을 바친 홍 회장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철탑산업훈장(78년), 대통령표창(78년) 등을 받았다.


46년의 역사를 가진 남양유업은 또 다른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4무 경영에 4유(有) 경영을 접목하고 있다. 기술, 인재, 고객 커뮤니케이션, 미래가 있는 기업이 되자는 게 4유 경영의 목표다. 이는 "넓이보다 깊이 있는 경영이 미래를 좌우한다"는 홍 회장의 철학에 따라 기술과 인재에 투자해 미래를 준비하겠다는 남양유업의 미래 전략이다.


조강욱 기자 jomar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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