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상 무선조정 모형항공기 전문가
모형비행기를 볼때마다 평생의 동반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색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R/C 란 무선조종 모형항공기의 영문 약어로 라디오 콘트롤(RADIO CONTROL)을 뜻한다.
필자와 모형항공기와의 인연은 중학교 1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산 공군기지 인근에 살면서 RF(Radio frequency ㆍ무선 주파수)관련 중고부품을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재생 릴레이 온오프 방식'의 원격제어 장치를 제작하면서부터 나의 길고긴 R/C인생이 시작됐다. 모형항공기 무선조정에 맛을 들이면서 4채널 오디오를 제작해 음악감상을 하기도했다. 또한 전자회로 서적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며 무선조종 제어장치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
송탄에서도 구하지 못한 희귀부품은 서울 장사동 뒷골목의 중고부품 가게를 샅샅히 뒤져 찾아냈다. 그 와중에 고물상에서 통신기기며 라디오 등을 사다가 하나하나 분해하면서 얻은 게르마늄 트랜지스터 등의 부품으로 초재생 방식의 송수신기를 조립해내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결과 모형항공기를 대략 100~200m 정도 제어할 수 있게 됐다.
무선제어장치는 만들었지만 모형비행기가 문제였다. 목재소에서 오동나무가 제일 가볍다는 말을 듣고 통째로 오동나무 한그루를 사들였다. 이 나무를 목재소에서 얇게 켠 다음 집으로 싣고와 옥상과 다락방에서 말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무가 이리저리 뒤틀려 중도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듣지 못하던 '앵앵'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집앞 공터로 달려가보니 미군들이 모형비행기를 날리고 있었다. 그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 날이후 모형비행기 외에는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다.
미군 아저씨에게 부탁해 매우 가볍고 뒤틀림이 없는 두께 1.8mm 길이 90㎝되는 나무판자를 구하게 됐다. 발사 조립키트인 '주니어 팰콘 049' 라는 모형비행기와 앙상한 모형항공기의 뼈대에 옷을 입히는 소재인 모노코트 그리고 매우 가벼운 소재의 접착제인 엄브로이드 등 부속품 등을 사들이면서 R/C의 매력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됐다.
여담이지만 그 시절 국내 유일의 부품 판매점은 바로 서울 내자동에 위치한 동학과학이었다. 주인아저씨는 팔순이 넘으셔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우여곡절 끝에 모형비행기 재료는 준비했지만 무선조종기의 가격은 엄청나게 비쌌다. 당시 미8군에서 판매하는 로지테크, 시루스 그리고 크라프트사 제품의 가격은 150 달러를 훌쩍 넘었다. 계속되는 단식투쟁 끝에야 간신히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었다.
당시 노란색 미제 익스퍼트 조종기를 어렵사리 장만해 며칠을 끙끙대며 간신히 모형비행기를 완성했다. 제대로 만들어 졌는지도 모른 채 몇시간씩 씨름을 한 끝에 겨우 엔진에 시동을 걸었다. 프로펠러가 부러지고 날개가 부서지기를 수차례 한 뒤에야 비행기는 하늘로 솟구치는가 싶더니 이내 수직으로 곤두박질 치고 말았다. 비행시간은 기껏해야 2~3초 정도였을 것이다.
망가진 비행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며칠째 비행기를 만지작거리다 어느날 귀인을 만나는 행운이 찾아왔다. 미군부대 후문에서 한 한국인이 비행기를 날리는 것을 보고는 한걸음으로 달려가 꾸벅 인사하고 도움을 청했다. 이 분이 바로 '강현구 화백'이었다. 강 화백은 당시 미군주최 모형비행기대회에서 입상까지 하신 분으로, 이런 분의 개인지도를 받은 덕분에 필자가 모형비행기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는 영예까지 안게 됐던 것이다.
이후 필자는 국내에서 개최되는 거의 모든 대회를 찾아다니면서 출전 경험을 쌓았고, 육군 입대후에는 주한미군과 한국군이 함께 R/C 항공기를 표적으로 대공사격을 하는 부대로 차출되는 행운이 이어졌다.
새벽부터 밤12시에 이르도록 사격 지원에 시달려 망가진 비행기들을 수리하는 것이 다른 사병들에게는 고역이었겠지만 필자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 군 복무 시기는 평생해도 힘들만큼 많은 모형비행기를 만들고 부수는 것이 주된 일이었을 정도다. 군 생활을 마치고 다시 국내대회에 복귀해 대한민국 모형항공기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는 등 운도 따랐다.
필자는 처음으로 일본의 '인터내셔널 에어미트'라는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하지만 일본의 톱 플라이어들이 모형비행기를 날리는 것을 본 순간 감히 내 비행기를 꺼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국제대회의 수준을 실감하고 씁쓸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스타일의 기체를 다시 만드는 기초를 익힌 뒤 미국에서 비디오 테이프 등을 구해 비행패턴 등을 다시 분석하며 연습을 거듭했다. 그 결과 1991년 호주 왕가라타에서 개최된 F3A 비행기부문 세계선수권에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영예를 다시 머거쥐게 됐다.
당시 필자는 국내 메이커인 하이텍의 국산조종기 '포커스-6'을 들고 출전했다. 첫 대회치고는 에피소드도 많았다. 연습에 몰두하다 보니 황당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른 새벽에 연습비행장에서 착륙 연습을 한데 랜딩 진입 중이던 내 주력기의 날개가 갑자기 부러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라 당황해하면서 추락한 기체를 주워 모으며 주위를 살펴보니 완전히 흰색의 잎사귀 하나 없는 나무들이 여러 그루 앞에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저 약간의 안개로 앞의 시야가 흐린 것인 줄 알았는데 나무 사이로 모형비행기를 날리가 가지에 부딪혀 날개가 파손됐던 것이다.
한국의 푸른 잎사귀와 나뭇가지만을 고정관념으로 갖고 있던 필자에게 흰색 나뭇가지가 관념의 허상에서 깨어나라고 한방 날렸던 셈이다.
정말 뼈아프고 황당한 경험을 겪으면서 주력기를 잃어버리고 숙소로 돌아와 오후에 있는 본 시합의 비행순서를 포기하려니 씁쓸하고 안타까워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그나마 당시 호주에서 이민중이던 교포 한분으로부터 기체를 빌려 부랴부랴 포커스-6 조종기를 탑재해 시합에 임할 수 있게 된 것은 그야말로 다행이었다. 경험 자체가 너무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1993년도 오스트리아 벨덴서 개최된 F3A 비행기 세계선수권에 다시 출전하게 됐고, 이 때도 필자는 국산제품인 하이텍의 'PRISM-7' 국산 조종기를 앞세워 대회에 출전했다. 하지만 외국선수와의 현격한 기량 차이만 확인했을뿐 배움의 길이 멀고 험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직장을 옮기면서 모형항공기 국가대표 선수 생활을 은퇴하게 됐고, 얼마간의 공백기 이후 헬리콥터(F3C)로 종목을 바꾸게 됐다. 1995년에는 헬리콥터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는 기회를 잡게 됐다. 국내 최초로 비행기에 이어 헬리콥터 날리기 세계선수권에 출전하는 2종목 도전 선수가 됐던 것이다.
당시 모형헬리콥터 날리기 세계선수권 대회는 1995년 일본 카사오카에서 열렸다. 당시에 일본 교쇼사의 지원으로 '컨 60' 을 지니고 출전해 세계랭킹 19위를 기록함으로써 국내 최초로 세계랭킹 20위권 안에 진입하는 쾌거를 일궈내게 된다.
1997년에는 터키에서 열린 헬리콥터 세계선수권에 출전했고, 후원업체인 삼성을 비롯해 한국에서 가장 많은 협회 관계자와 수행원이 따라왔던 대회였다. 터키대회에서도 필자는 세계 랭킹 19위를 기록하며 4년 연속 20위권에 포함되는 기량을 발휘했다. 하지만 1993년부터 2005년까지 국가대표 생활을 계속하면서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됐고, RCDH란 모형항공기 회사를 창업하면서 결국 은퇴를 결심하게 됐다.
국내에서 대통령배 항공레저스포츠대회에서 3회연속 종합우승했을때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필자는 창업 후 2년간 청소년을 위해 그린 청정에너지인 리튬플리머로 비행하는 전동 무선조종 모형항공기를 순수 국산제품으로 개발한데 가장 큰 자부심을 느낀다. 특히 국내 최초로 12셀 고전압 디지털 리튬플리머전지를 개발하는데 성공해 해외수출까지 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국산 무선조종 글라이더로 '안양 청소년 수련관 모형항공기반' 꿈나무들을 가르쳐 전국대회에서 2년간 1.2.3위의 상위 입상기록을 석권한 것도 기분좋은 추억거리다.
모형 비행기가 이토록 우리의 삶을 풍족하고 윤택하게 해줄 수 있다는 작은 깨달음을 많은 이들과 나누고 공유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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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상 무선조정모형항공기 전문가.RCDH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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