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고의 상아탑', '중국의 수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한 대학', '중국의 서울대’
북경대를 칭하는 수식어들이다. 최근에는 북경대 졸업자가 중국 차기 주석후보로 내정되면서 다시 한 번 북경대 주가가 치솟고 있다. 과연 북경대는 어떤 곳일까?
단순히 숫자만으로 북경대를 표현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북경대가 갖고 있는 숱한 매력들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는 북경대. 하지만 어느 외국 학교보다 한국 유학생이 많은 학교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필자가 써내려갈 글들이 북경대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필자가 처음 북경대에 발을 들여놓은 때는 4년 전인 지난 2005년 9월. 가슴이 벅찼다. 각 '시(市)'와 '성(城)'에서 몰려온 중국 최고 인재들은 어떤 모습일까? 혹시 남다른 교수들의 수업방식은 있지 않을까? 궁금증이 쏟아졌다.
수 많은 생각으로 들떠 있던 필자가 처음 들어갔던 수업은 '헌법'. (필자의 전공은 법이다) 수업에 들어온 학생들의 면면을 본 순간 당혹스러웠다. TV에서나 볼 듯한 '범생이 타입'의 중국 친구들이 200여명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90%의 학생들이 안경을 꼈고,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가방에 유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복장과 헤어스타일이었다.
한쪽 구석엔 다른 나라 학생 무리들이 삼삼오오 몰려있었다. 그 중엔 한국인도 20명 정도 껴있었다. '김혁'이라는 이름의 북한 학생도 있었다. 그밖에 대만인, 홍콩인, 러시아인, 미국계 화교, 아프리카 사람이 각각 한 명씩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다른 학과들에 비하면 적은 숫자다.
첫 수업은 동네 아저씨처럼 생긴 40대 초반의 남자가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강의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그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분필을 잡더니 뭔가를 적어가기 시작했다. 북경대 법학과 헌법학 교수, 이름은 '짱치엔판'
5분 정도 지났을까? 짱치엔판 교수는 강의를 시작, 진도를 빼기 시작했다. '첫날이니 수업은 없겠지' 했던 안일한 생각은 여지없이 깨졌다.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 노트와 녹음기를 꺼내며 공부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 때서야 분위기 파악이 끝난 필자는 황급히 그들과 행동을 같이 했다.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교재조차 없었던 나는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수업은 계속 진행됐다. 2시간의 수업이 끝나고 10분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옆을 보니 가관이다. 다른 학생들은 교수의 10분 휴식조차 허락 하기 싫었는지 쉬는 시간에도 교수를 둘러싼 채 질문공세를 하는 것 아닌가. 앞날이 걱정돼 착잡한 심정이었다.
나머지 수업이 끝나자 나도 모르게 바짝 얼었다. 하지만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잠시 후 시작된 '법학원리' 수업. 복건성 어디에선가 올라온 연세 지긋한 교수가 강단에 섰다. 아뿔싸! 그 교수의 사투리는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할 수준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수업 시작 후 10분이 지나자, 좌절 모드에 돌입했다.
그 때 불현듯 스쳐갔던 한 마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군대에서 고참들에게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그래, 좋다. 군대 한번 더 왔다 생각하자!' 그렇게 나의 '북경대 군(軍)생활'은 시작됐다. 그게 벌써 5년째다.
글= 최영서
정리= 윤종성 기자 jsyoon@asiae.co.kr
◇ 최영서 씨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중국의 무한한 발전에 매력을 느껴 무작정 중국으로 유학, 1년6개월만에 북경대 법학과에 합격했다. 운동을 좋아해 애니캅이라는 사설경비업체 출동팀, 롯데호텔 안전실 근무 등에서 일한 경력도 있다. 지난 장애인올림픽 기간에는 통역 및 가이드를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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