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현준 기자]
금강산에서 29일부터 시작된 추석계기 이산가족 2차 상봉행사에서 재회한 남북의 이산가족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뜬 눈으로 몇일을 지새운 뒤 상봉장에 나갔지만 찾던 형·동생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나온 것을 확인하고 허탈하게 돌아선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다.
○...북한에 있는 큰형님을 만날 생각에 속초에서의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금강산에 도착한 이산가족 이종학(77)씨와 이종수(74)씨는 29일 부풀었던 기대를 접어야 했다.
북측에 떨어져 지낸 형님으로 알고 만난 리종성(77)씨는 그들이 찾던 형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북측에서 내려온 종성씨 역시 허탈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남에서 올라온 가족들이 자신이 찾던 동생들이 아닌 것을 완전히 확인하고는 상봉장을 쓸쓸히 떠났다.종수씨는 "(리종성씨가) 상봉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데 멀리서 보니까 형님이 아니더라"며 "몇분간 얘기를 해봐도 우리 형님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적십자 관계자는 "양쪽에서 찾는 이름이 서로 같아 남북간에 약간 착오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 자세히 확인을 해봐야겠다"며 당황한 모습이었다. 통일부 관계자는 "과거에도 이런 사례가 드물게 있었다"며 "양측이 준비기간이 짧아 재확인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설명했다.
종학씨는 "12차 상봉 때 형(리종성)이 먼저 우리쪽 가족들을 찾아서 한번 만났었는데 이번에 또 만난다고 해서 안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적십자측은 "같은 사람을 찾는다고 해서 북에서 일단 신청이 들어오면 만나게 해드린다"고 설명했다. 기다리던 형을 만나지 못한 종수씨 가족은 이르면 30일 남측으로 귀환할 예정이다.
적십자측은 "돌아가신다고 하면 북측과 협의해 내일이라도 내려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고 종학씨는 "여기 더 있을 필요가 없다"며 상봉행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먼저 내려갈 뜻을 밝혔다.
○...북에 살던 누나 김해숙(76)씨를 만난 김병진(71)씨 등 남측 동생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전쟁이 일어나던 해 스무살이던 해숙씨는 당시 동네인 종로구 제동에서 반장을 했다. 그러나 그것이 긴 이별의 원인을 제공할줄은 누구도 몰랐다.
해숙씨는 "반장들은 교동초등학교로 모이라"는 인민군들의 통지를 받고 집을 나섰다가 연락이 끊겼던 것이다. 가족들은 해숙씨가 북으로 올라갔거나 폭격을 받아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부모님이 마음에 묻어둔 큰딸은 59년이 지난 뒤에야 동생들을 만났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북측 군에 합류한 해숙씨는 군에서도 밝은 모습을 보여 본명 '병옥' 이 아닌 '해숙'으로 이름까지 바꿨다. "상사 앞에서 해죽해죽 웃어서 '해숙'이가 별명이었는데, 그게 내 이름이 됐어"라며 동생들에게 이름이 바뀐 사연을 설명했다. 모처럼 함께 웃던 남매들은 파편에 맞아 이마가 1cm쯤 꺼진 해숙씨의 상처를 보며 눈물지었다.
전쟁후 해숙씨 소식은 묘연했지만 가족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병진씨는 언젠가
누님의 연락이 올 것만 같아서 살던 제동의 낡은 한옥을 떠나지 않았다.
반세기 만의 만남 앞에 이들은 벌써 헤어질 걱정이 앞섰다. 병진씨는 "누님 꼭 만수무강해야돼"라고 했고, 해숙씨는 "빨리 통일이 돼서 자주자주 만나야지"라며 손을 꼭 잡았다.
○..."아버님은 당신 때문에 동생 둘이 죽었다고 생각하시고 명절때만 되면 술잔을 놓고 우셨습니다."
2차 상봉단에 포함된 어윤천(55)씨는 북에 있는 작은아버지 어성우(76)씨와의 감격적인 첫 만남에서 이 같이 말하며 울먹였다. 성우씨는 윤천씨에게 아버지 원우(1994년 작고)씨를 대신해 북한 의용군으로 끌려간 특별한 삼촌이다.
전쟁 당시 큰 형인 원우씨에게 북한군 의용군 소집 명령이 떨어지자 성우씨는 "형님은 장남이니까 나가지 말고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둘째 형 영우(85)씨와 함께 의용군으로 나갔던 것이다.
윤천씨는 성우씨와 함께 징집된 다른 삼촌 영우씨의 생존 사실도 확인, 기쁨이 더했다.
성우씨는 이날 상봉단의 일원으로 금강산을 찾은 형수 신윤순(88)씨가 '어영우는 어찌 됐느냐'고 안부를 묻자 "형도 살아 계신데 이번에 같이 못왔다"고 답했다.
○...윤치원(79) 할아버지는 남측에서 자신을 만나러 온 동생들의 손을 잡고 "아버지 묘지에 가봐야 해. 그게 내 소원이야"라며 오열했다. 윤 할아버지는 "통일될 때까지 우리 꼭 살아야돼"라며 죽기전 고향인 충남 강경에 모셔진 아버지의 묘소에 꼭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북측 상봉자들이 다 나타나도록 윤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초조해하던 세 동생들은 멀리서 윤 할아버지 모습이 나타나자 벌떡 일어나 반겼다. 윤부정(67·여)씨는 두손을 들고 오빠를 부르며 다가갔고 윤동원(64)씨도 "형님 들어오는데 딱 아버지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자리에 앉은 뒤 윤 할아버지는 당초 오기로 했다가 건강문제로 못 온 여동생 효정·의정씨의 소식을 자세히 물었다.
한국전쟁 당시 동국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다 행방불명 처리됐던 윤 할아버지는 북에서 수력건설 관련 기사로 근무했다. 그는 각종 저수지 설계로 북한 당국에서 받은 훈장을 동생들에게 보여주며 "내가 황해북도에서 훈장이 제일 많다"고 자랑했다.
○..."혼자만 공부해 미안하다."회색 중절모를 쓴 노신사 최병욱(79) 할아버지가 60년만에 만난 동생들에게 제일 먼저 털어놓은 말이다. 한국전쟁 발발때 서울대 물리학과에 재학중이던 최 할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학교에 잠시 나간다고 한 뒤 연락이 끊겼다. 최 할아버지는 북한 평양 3중학교에서 4년간 교원을 지낸 뒤 김책공대에서 지질탐사를 전공하고 연구직으로 평생 일했다.
최 할아버지는 "부모님이 나를 가르치려고 동생들을 못 가르친 게 제일 미안하다"고 말했다. 오빠를 만나기 위해 남측에서 올라간 동생 최기자(65.여)씨는 "오빠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는데, 북에서도 공부를 많이 했다"며 "돌아가신 부모님이 똑똑한 아들을 잃었다고 무척 가슴 아파하셨다"고 말했다.
○...리혜경(75·여)씨가 이산가족 면회소에 들어서자 남측에서 온 혜경씨의 가족인 김유중(100) 할머니와 황복(77·여), 희경(72·여), 경희(62·여), 도성(58)씨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58년 만의 만남이다.
상봉 전부터 눈물을 흘리느라 눈이 벌겋게 충혈된 희경씨가 "언니, 언니"하고 부르자 혜경씨는 "희경아, 나 언니야"라며 잰걸음으로 달려온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부둥켜안은 채 흐느꼈다.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울기를 3분.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혜경 씨였다.
혜경씨가 "엄마 건강하세요? 내 말 들려요?"라고 묻자 1,2차 상봉행사 통틀어 최고령자인 김 할머니는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혜경씨는 우는 어머니의 모습이 안쓰러운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며 "엄마 울지 마세요"라고 위로했다.
간신히 눈물을 그친 김 할머니에게 58년만에 딸을 만난 소감을 묻자 "말할 수 없을 만큼 기쁘다"며 "오래 사니 딸도 만나고.."라고 나지막이 답했다. 혜경씨는 전쟁 중이던 1951년 북한으로 넘어간 뒤 의대를 나와 위생 보건의로 일했으며 남편은 북한 모 대학 학장을 지내는 등 북측의 지도층 인사로 알려졌다.
○...59년만에 한자리에 모인 4형제는 손을 꼭 잡은 채 연방 눈물을 훔쳐댔다. 1950년 6월25일, 육군사관학교 졸업반이던 하태용(81)씨는 휴일 외출을 나갔다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가족과 연락이 끊겼다.
태수(74), 태호(69), 태선(66)씨 등 동생들은 시내 폭격으로 한강다리가 끊기고 강에는 시체가 떠다닌다는 풍문을 듣고 행방불명된 형도 숨진 것으로 짐작했다. 7년 전 유명을 달리한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해마다 현충원에서 형 제사를 지냈다.
그렇게 죽은 줄만 알았던 형이 남측의 동생들을 찾았다는 소식에 가족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고 한다. 북에서 결혼도 하고, 자식들도 다 키워 결혼시켰다는 태용씨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태수씨는 "형 떠나고, 전쟁 중에 큰형도 행방불명돼 이번에 연락 온 게 처음에는 큰형인 줄 알았다"며 "작은형이 살아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남은 형제 세 명은 아직까지 충북 제천에 모두 모여 산다"고 하자 태용 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한시도 잊지 못했다"고 했다.
상봉 첫날 이들 형제는 한시가 아쉬운지 연방 시계를 바라보며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산가족 상봉행사 진행을 위해 나온 북측 관계자들은 국회의 정운찬 총리 인준문제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는 모습이었다.
한 관계자는 남측 기자들에게 "우리가 봐도 (정운찬 총리가) 대답을 잘 못하더라. 국회 통과가 됐느냐"고 물었고, 다른 관계자는 이귀남 법무장관 후보자와 백희영 여성부 장관 후보자와 관련해 "통과가 되는 것이냐"며 궁금증을 나타냈다.
이들은 남측언론이 이산가족 상봉을 어느 정도 비중으로 보도하고 있는지에 대해 묻기도 했다.
○...약 2년만에 재개된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북한 취재진들도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조선중앙통신, 노동신문, 조선신보 등 20여명의 북측 취재진들은 29일 단체상봉이 시작되자 테이블을 돌아다니면서 남측 가족들을 상대로 '헤어진 지 얼마나 됐느냐' '만나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시냐' '상봉소식을 들은 뒤 어떤 느낌이었느냐' 등을 물었다.
1차 상봉행사의 첫날인 지난 26일부터 취재하고 있다는 조선중앙통신의 한 기자는 이산가족 상봉행사와 관련,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이라며 "여러 번 봤지만 볼 때마다 애절한 것은 똑같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나중에 시간이 되면 남북의 기자들이 따로 만나자고 제안하는 등 남
측 취재진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한편 북측 취재단 중에는 상봉장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사진촬영을 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 소속 여기자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남측 기자들이 이 기자에게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대한 소감을 묻자 미소를 지으며 "가족이 우선이지, 저한테 물어서 뭐하시게요"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북쪽 남편 로준현(82)씨는 남쪽 부인 장정교(83)씨를 보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손만 쓰다듬었다. 16세 꽃다운 나이에 시집왔던 아내가 할머니가 돼 있었다.
남편이 어색해하자, 남쪽 아내는 '딸이 몇 살 났을 때 헤어졌는지 기억하느냐'고 물으며 말을 걸었다. 남편은 주저없이 "다섯살이야"라고 했다.
경북 예천군에서 농사를 짓던 로씨는 1950년 5살난 딸 노선자씨와 두 살배기 아들 노영식씨를 남겨두고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전쟁후에도 소식이 없자 가족들은 모두 로씨가 죽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도 남쪽의 아내는 재혼하지 않고 홀로 농삿일을 해가며 두 자식을 키워왔다. 남쪽 아내는 "오늘 오나 내일 오나 기다리다가 내가 시부모님도 다 모시고, 잘 모셨다고 상장까지 받았어요"라며 원망어린 눈으로 남편을 쳐다봤다.
남편은 "시부모님도 다 모셔주고. 내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남편은 북쪽에서 결혼해 2남5녀를 두었다는 소식을 미안한 표정으로 전하기도 했다.
딸 선자씨는 상봉테이블에서 아버지 앞에 주저앉아 울면서 "모시고 가면 얼마나 좋을꼬"라고 안타까워 했다. 딸은 아버지가 고향에 지어놓은 집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면서 남쪽 가족들이 모두 잘 살고 있다고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백발이 된 남쪽 동생 가현씨는 "왜 가족들을 더 일찍 찾지 않았느냐"며 형님을 원망했다. 북쪽 아버지이자 형은 흐느끼면서 가족들의 얘기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남측의 딸 전향자씨를 만나러 온 북측의 전기봉(85)씨는 북측기자들의 집중적인 취재대상이 됐다. 그는 '조국통일상'을 받은 공화국 영웅이자, 김일성 종합대학 교수까지 지냈다고 한다. 기봉씨는 자신의 집에서 가져온 가족 사진과 훈장, 배지들을 보여주며 하나하나 가족들에게 설명했다.
전씨는 특히 남측에서 온 손녀 장희영(15)양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한 뒤 자신이 가져온 사진을 주며 "갖고 싶은 거 다 가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딸 향자씨가 사진과 훈장 설명에 여념이 없는 전씨에게 물을 권하자 "일 없어, 일 없어"라며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금강산=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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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준 기자 hjunpark@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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