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종 시인의 담양정자, 시적 풍류의 산실<2>
수기의 과정을 제대로 거친 후에야 치인(治人)의 단계로 갈 수 있었습니다
사실 조선조의 사대부는 선비를 지칭하는 사(士)와 관료를 지칭하는 대부(大夫)의 합성어로 학자 관료집단입니다. 사대부는, 선비가 관료가 되기 위하여 피나는 수련과정을 거치는 수기(修己) 단계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치열한 인격수양을 병행해야 했고, 수기의 과정을 제대로 거친 후에야 치인(治人)의 단계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적능력이 출세의 지름길임엔 분명하지만 지식의 많고 적음보다도 실천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었으니, 그들의 청빈정신,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고야마는 서릿발 같은 기개, 일관된 지조 지키기와 종교적이라 할 만한 엄숙주의, 그 속에 간직한 유머와 여유로움, 탁월한 자기 제어력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우선하는 생활태도 등은 오늘날 진보적 지식인의 도덕주의보다 더욱 치열한 선비정신이던 것입니다.
가령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향한 꿈과 좌절을 보여준 정암 조광조, 경(敬)으로서 나를 밝히고 의(義)로서 나를 던진 선비인 남명 조식, 세계화의 기치를 올린 비범한 선각자 연암 박지원, 유배지에서 삼정문란의 폐해를 그린 '애절양'(哀絶陽)의 시인이기도 한 다산 정약용, 시서화에 능했던 김정희 등등 그들은 그들 세상에서의 윤리와 도덕 혹은 정치와 예술 행위에 있어서 최선의 가치와 의미를 추구한 엘리트들이었던 것입니다.
$pos="C";$title="";$txt="고풍스런 문을 열고 면앙정이 나오지는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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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앙정 잡가'(?仰亭 雜歌)에서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 칸 지어내니// 반 칸은 청풍이요 반 칸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던 송순의 흥취와 풍류정신 앞에서, 그가 경영한 전답이 몇 십만 평이요 거느린 노비만 해도 200여명이나 된다는 비판이 설령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 할지라도 당대의 소이연(所以然)을 감안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요, 그러하기에 되레 소요자연에의 꿈이 더욱 절실했던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면앙정이기에 그를 흠모한 김인후, 고경명, 기대승, 박순 등 내노라하는 걸출들이 정자에 들러 소위「면앙정 삼십영(?仰亭 三十詠)」시를 앞 다투어 읊었으니, 이는 면앙정에 올라 빙 둘러보면 펼쳐지는 서른 가지 경치로 추월산의 푸른 절벽, 용구산의 저녁구름, 몽선산의 푸른 소나무, 불대산의 낙조를 비롯하여 저녁비, 산봉우리, 아지랑이, 안개, 바람, 눈빛, 나무꾼의 노래소리, 어부의 피리소리, 기러기, 가을달, 대나무, 해오라기, 붉은 여뀌, 오솔길 등등입니다. 그들은 삼라에 펼쳐진 이 두두물물(頭頭物物)의 빛과 숨결을 명명하고 호명하느라 우주율(宇宙律)을 동원했던 것입니다.
존재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은 인간과 신들의 하나를 꿈꾸는 일이기 때문
지금은 도시건물들이 들어서는 등 각종 개발로 인해 그 풍경이 절반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면앙정에서 옛 시인들처럼 발아래로 펼쳐진 들판이며, 저 멀리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이며를 빙 둘러보다가 나 또한 이 땅 시단의 말석으로나마 살며 땅에서 하늘에 이르는 무기물에서 모든 생령에게까지 그 이름을 새롭게 지어주고, 그것들의 이름을 애틋하게 불러주는 일이 한편으로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일로 생각되어졌습니다. 모든 존재들의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불러주는 일은 사실 그것들과의 교감을 통해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들의 하나 됨을 꿈꾸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pos="C";$title="";$txt="사미인곡으로 널리 알려진 송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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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심의 백미는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정철이 1585년 선조 18년에 당쟁의 와중에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논척을 받아 담양 창평에 물러나 있을 때 송강정을 짓고 3년째 되는 해에 지었다는 '사미인곡'은 임과의 인연과 이별, 임에 대한 자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읊고 있는 가사인데,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작자의 능란한 솜씨가 이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이 몸 생겨날 제 임을 좇아 생겨나니
한평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젊어 있고 임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 줄 데 다시 없다
평생에 원하기를 함께 가자 하였더니
늙어서 무슨 일로 홀로 두고 그리는고
(중략)
차라리 죽어가서 범나비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았다가
향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내 임 좇으려 하노라
'사미인곡'의 서두와 말미 부분입니다.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 되어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았다가/ 향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는 고백은 임에 대한 그 절절한 사랑의 말로 최고의 경지를 구가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부하는 글로도 보여 역겹기 그지없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런 뜨거운 연애시가 실은 자기를 총애하고 또 자기를 버린 임금에 대한 끝없는 충절과 고뇌의 소산이라는 데 있습니다. 물론 조선시대의 사대부라면 마땅히 취해야 했던 임금을 향한 삶의 전형적인 가치를 구현함으로 일찍이 송죽지절(松竹之節)의 경지를 획득한 글임엔 분명합니다만, 한편으로 보면 임금이 다시 자기를 불러주길 애원하며 극도로 아부하고 또 아부하는 글로도 보여 역겹기 그지없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pos="C";$title="";$txt="송강정 마루에 걸터앉은 시인이 골똘한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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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정에 올라 발아래 앞과 옆으로 뚫린 고속화국도의 소음을 한탄하면서도 정철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착잡합니다. 정철은 국문학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면서 당쟁의 와중에서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투쟁의 선봉에 섰던 사람입니다. 사실 그에 대하여는 워낙 큰 문학가로서의 비중 때문에 정치가로서의 면면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정치가로서의 그는 당쟁의 와중에서 너무나 첨예하게 한쪽 편에 섰던 관계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불운한 사람이었지요. 어려서부터 을묘사화(乙卯士禍) 등 권력 암투의 희생양으로 고통을 받았던 기억 탓인지 그는 평생을 정쟁의 마당에서 날뛰었습니다.
송암 이원준의 자료에 의하면, 정철은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직선적인 성품으로 호오가 너무도 분명하여 교류관계도 적이 아니면 친구로 확연히 구분했습니다. 정치적 융통성과 포용력이 부족했던 그는 반대파에 대하여 언제나 극렬한 감정적 대응을 하여 상대를 어떻게 하든지 제압하려고만 했습니다. 치열한 성품의 그에 대하여 친구인 율곡은 충고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사리에 치우치지 말고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라.”고 하기도 했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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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격하고 불같이 급한 그의 성정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 소위 정여립모반사건의 처리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건이 발생하자 맏아들의 상중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취조관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1,000여 명에 이르는 반대파를 제거하는, 소위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는 실로 '사미인곡'이나 '성산별곡' 같은 아름다운 시를 지은 인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하고도 악착같은 일면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술가로서 그의 자질과 존재는 너무나 뚜렷하여 이것이 그의 정치적 기복을 무척 덮어주었지요. 그는 풍부한 시적 상상력과 섬세하고도 연연한 감정의 세계를 맛깔스러운 글로써 잘 표현해낸 뛰어난 시인이었습니다. 현실 세계의 실의와 참담함에 대한 보상적 사고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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