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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떠나는 전라도 여행[20]

최금진 시인의 '화엄사' 기행<2>

길 위에서 만나는 것들은 아리고 아리다



이제 화엄사 가는 길을 적기로 한다. 이야기의 순서가 바뀐 듯하지만, 그러나 각황전 석등에서의 신비로운 체험은 이 여행의 동기이자 출발점이므로 실제적인 이야기 순서가 바뀐 것은 아닐 것이다. 화엄사에 이르기 위해 무엇을 보았던가. 고속도로를 지나 석곡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17번, 18번 국도를 따라 흘러가는 섬진강을 보았던가. 물오리 떼가 내려앉은 섬진강변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흰 머리 노인네 같은 바위들을 보았던가. 재작년 봄에 왔을 때 보았던 자운영꽃 가득한 논밭에 벼들은 예쁘게 자라고 있었던가. 섬진강에서 재첩을 잡던 늙은 수부水夫를 보았던가. 그들은 왜 하나같이 검고 마르고 똑같은 표정이었던가.

오래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가물가물한 기억들을 더듬어본다. 그러고 보면, 화엄사에 이르기 위해 거쳤던 주변 풍경들은 이제와 생각하니 턱없이 낯설다. 그들에게 모두 마음을 주지 못한 탓이다. 여행은 거창한 무엇을 보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 자연물에 인간의 감정을 이입해 보는 것이며, 그들의 감정을 느껴보는 것이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자연이고 그것은 함부로 이름 붙여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인간과 같은 존엄성을 부여해주면 그들은 눈을 뜬다. 시를 쓰는 것은 들리지 않는 그들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다. 시가 잘 안 풀릴 때 내가 자동차를 타고 바깥을 나도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오래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생각과 깨달음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다. 배롱나무가 본디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지만 섬진강변에 서 있으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한 여인의 모습이 된다. 배롱나무들은 그 줄기가 억세면서도 낭창낭창 부드러운 것이 남도 여인을 연상시킨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지만, 백 일 정도까지 핀다는 뜻으로 백일홍百日紅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배롱나무는 그 이름 자체도 문학적(?)이어서 나는 한때 배롱나무를 화분에 담아두고 키우려는 욕심을 둔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배롱나무는 길가에 세워져 있어야 배롱나무다운 법. 강변을 향해 서서 바람결에 남도가락이나 풀어내는 여인. 아리고 아린, 쓰리고 쓰린 남도 아리랑이 들려올 것만 같은 강변에서 나는 배롱나무를 본다. 강변엔 또 잠자리 떼가 무척 많다. 장마와 장마 사이에 날은 개었고 때마침 잠자리 떼가 하늘을 가득 수놓으며 날고 있었다. 자동차 속도를 내려도 앞 유리에 와서 부딪히는 잠자리들 때문에 여간 마음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잠자리는 공룡보다도 더 오래 지구에 있어 왔으니까 엄연히 이 땅의 주인은 잠자리들인데, 불청객인 사람들이 그들의 지상을 빼앗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슨 잠자리들이 이리도 많은가. 구례읍에 들어서면서 깨달았다. ‘구례 잠자리생태관’ 우리나라엔 90여종의 잠자리들이 있는데 그중 80여 종이 구례에 살고 있다는 것. 왜 잠자리들은 이곳으로 꾸역꾸역 모여 살게 되었을까. 구례읍을 빠져나와 화엄사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 하면 길 옆으로 마을이 있다. 일전에 왔을 때는 가을이어서 집집마다 감나무들이 환하게 등을 켜들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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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를 내려오다가 다시 보면 그건 영락없는 불국정토佛國淨土의 세상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여름인지라 감나무들은 알사탕만한 푸른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나는 산속에 있는 외딴 마을을 보면 서글퍼진다. 누군가 개미처럼 이 높은 곳을 걸어와 집을 지은 것이다. 또 그 후손들은 처음 터를 세우고 집을 지은 초라한 가장의 뜻을 따라 거기에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집집마다 심어놓은 감나무를 보면 그것이 곧 그들의 가훈家訓이며 그들의 문패인 것이다. 외딴 곳에 집을 지어놓고 한 평생 보낼 생각을 한 그 착한 한 사람의 마음이 때로는 어떤 불빛보다 더 밝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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