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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떠나는 전라도 여행[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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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확의 수화 김환기의 고향 안좌도 여행<2>


그러나 어디까지나 내 마음의 중심을 차지했던 것은 안좌도. 그중에서도 수화(樹話) 김환기의 고향 앞바다였다. 나는 처음 안좌도 읍동항에 들어가던 석양녘, 잔물결마다 반짝이는 수천수만의 황금빛 편린들을 보면서 그의 점화(點畵) 세계의 비밀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그 때 나는 바다가 탄생한 이래 단 한 번이라도 똑같은 모양과 크기를 반복하지 않았을 물결들처럼 이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저만의 크기와 무게를 갖고 있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아주 미세하고 희미할지라도 차이와 다름을 가짐으로서만이 모든 사물들은 자기다움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걸 집약시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수화 김환기의 그림들이라고 생각한 바 있다.



바닷바람은 생의 순간순간이 항상 새로운 것이라고 일러준다

다시 그걸 확인이라도 하듯 나로선 두 번째가 되는 안좌도행. 연신 여객선의 뱃머리를 부딪쳐오는 파도도 이미 그 파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배 뒷전을 따라붙은 하얀 물거품들도 단 한 번이라도 똑같은 질량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바로 그것이 우주 생성의 첫째가는 비밀이라고 말하는 듯 순식간에 저만큼 떠밀려 간다. 뺨을 스쳐오는 소금기배인 바닷바람은, 그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것 같지만 모든 일상 또는 생의 한 순간순간이 모두 이전과 다른, 항상 새로운 것이라고 일러준다.



그렇듯 언제든 자신의 흔적을 지우며 보다 큰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던 수화의 일생을 통해, 나는 진정한 예술가의 조건이 무엇인가 가만 되묻는다. 하지만 그걸 알 턱이 없는 캐나다 여성 사라(27)양이 여객선 난간에서 ‘최북극(Far North pole)’이라는 두꺼운 책을 읽다가 서남해안에서 가볼만 한 섬이 어디냐고 묻는다. 대답 대신 나는 비금도 해변에서 일광욕하며 민박할 예정이라는 그녀의 푸른 눈을 들여다본다. 그녀는 왜 자신의 땅과 먼 거리에 있는 이 바다와 섬으로 찾아든 것일까. 그러면서 왜 남쪽 바다와 가장 멀리 떨어진 북극에 관한 책을 배 난간에 기대어 앉아 읽고 있었을까.

특이하게도 남해안과 서남해안 섬과 인근 해안가 지역의 오일장 날짜가 새겨진 여행 지도를 펴보이며 가볼만한 섬을 묻는 그녀의 푸른 두 눈은, 그러고 보니 영락없이 밤하늘에 반짝이는 영롱한 별이다. 순간적으로 수화가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의 한 대목. 대중가요로도 널리 알려진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는 시구절이 떠오른다. 과연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것인가.



육지와 떨어진 외진 곳에서 흰 소금 같은 고독과 그리움을 생각해본다


언제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낯선 이방인과의 이별을 못내 아쉬워하며 다시 바다로 눈을 돌리는 순간, 크고 작은 주변의 섬들. 오랫동안 거기 존재해왔던 섬들은 우리가 저마다 하나의 섬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누구나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섬. 그 해안 절벽을 타고 오르는 흰 물보라를 바라보며, 나는 끝내 이루지 못한 꿈과 사랑을 떠올린다. 육지와 떨어진 외진 곳에서 처절한 고립과 망각의 시간을 견디어야 했던 이들의 흰 소금 같은 고독과 그리움을 생각해본다.



그러나 세상과의 자발적인 단절 내지 격리의 장소로서 섬. 서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은 때로 불가피한 사정을 가진 자들의 선택적 은신 또는 피난의 넉넉한 품. 단절되고 고립된 상태나마 자기만의 매혹적인 삶의 규범과 철학을 가꾸는 낙원이 되어 주었다. 특히 그 속에서 화가 김환기의 섬은 지상을 천상과 연결시키는 배꼽. 그때 그 섬을 둘러싼 그 바닷물은 모든 생명들이 뛰노는 양수가 된다. 그 섬 속에 솟아오른 산은, 인류학자 엘리아데에 따르면 지상을 천상과 연결시키는 일종의 제단(祭壇). 관념적으로나마 이때 수화 김환기는 그의 그림들을 통해 일종의 제관(祭官)이 되어 우주의 정상에 오르고자 했을 터이다.


왜였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화 김환기는 이 바다, 이 섬들에서 더욱 멀어지고자 했을까. 끊임없이 탈향(脫鄕)을 시도하며 동경과 서울, 파리와 뉴욕으로 떠돌았을까. 나는 일차적으로 그것이 모더니스트이고자 했던 그의 작가적 행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본다.


예컨대 아방가르드 연구소를 조직하거나 신미술 운동에의 참여는, 되도록 한 종족의 기억이나 역사적 전통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일 수밖에 없다. 그가 불법 체류자의 신분을 감수하면서까지 뉴욕에서 활동한 것은, 자신이 속한 문명보다 더 진보적이고 화려한 신세계로 탈주하고자 했던 모더니스트의 열망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었을까. 과연 무엇이 끊임없는 변화와 변신, 자기부정과 파괴의 예술 정신을 갖게 했던 것일까. 연이어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를 보면서 문득 나는 수화의 예술가적 모험과 도전이 단지 그의 천성이나 의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잠긴다. 그의 끝없는 방랑과 모험이 다분히 끊임없는 해체를 거듭하기에 또다시 다른 모양으로 태어날 수 있는 수성(水性)과 깊은 연관성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바닷물처럼 언제든 자신을 무화시킬 수 있었기에 수화 김환기는 어떤 새로움이라도 달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화가였으며, 누구보다도 풍부하고 깊은 창조의 능력을 가진 화가로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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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의 예술가적 모험이 단지 그의 천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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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수화 김환기는 어떤 면에서 엄청난 욕심쟁이였다고 할 수 있다. 화가로서 한국사회에서 쌓은 일체의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세계 미술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미술적 역량을 확인하려 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예술가적 욕망은 자기 몫을 키우거나 과시하려는 욕망이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자기가 가진 것을 덜어내고 나눠 주는 자발적인 가난과 연결되어 있다. 침묵과 절제, 겸손과 양보가 바탕이 된 순수한 빈자의 욕망이 바로 예술가의 욕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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