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생전에 ‘경제 바이블’로 여기며 재임기간 동안 국가경제의 정책입안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던 대중경제론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대중경제론은 김 전 대통령의 이름과 ‘대중(大衆, mass)’을 뜻하는 의미와 우연찮게 중첩되면서 당시 정재계는 물론 학계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전문가들은 공히 대중경제론에 대해 한국적 특수상황에서 나름대로 일관된 경제시각과 체계를 갖춘 이론과 정책이었다는데 동감하고 있다. 사실 대중경제론은 김 전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탄생에 적지 않은 이론적 토대가 됐다.
이런 대중경제론의 탄생은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 전대통령은 경희대 대학원의 경제학과 학생으로서 석사논문을 제출했다. 논문 제목은 ‘대중경제의 한국적 전개를 위한 연구 : 한국경제의 구조개혁을 위한 서설’이었다.
한국경제의 경제성장에 대한 왜곡된 현실을 분석하고 그 대안으로서 대중경제의 출범을 제시하는, 이색적인 논문이었다. 대중경제론이 김대중 대통령후보의 정책으로 대중에게 선보이기 훨씬 전에 이미 대중경제론은 발효와 숙성의 과정을 거쳤던 것.
이 논문은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검토에서부터 시작하여 박정희 정권의 공업화정책, 농업정책, 외자도입 정책, 수출정책, 분배정책, 재정투융자 정책 등 경제 전 분야를 비판을 담았다. 단순 비판뿐만 아니라 대안돈 제시하며 한국적 대중경제론의 기본방향과 정책방향 구상까지 포함된 수준 높은 논문이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대중경제론은 비로소 빛을 발한다. 김 전대통령은 당시 대중경제연구소의 명의를 빌려 ‘대중경제론:100문100답’이라는 서적을 출판한다. 책은 나오자마자 당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선경쟁을 펼치면서 대중경제론을 통해 향토예지군 폐지, 남북교류, 4대국 안전보장안 등으로 박정희식 안보논리를 정면에서 공격하는 정책과 함께 박정희식 경제성장론을 공박하는 대중경제론을 제시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다.
당시 김대중은 대통령 투표에서는 90만 표라는 간발의 차이로 지고 말았지만, 대중들의 마음에 그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대중경제론에 대한 대중들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김 전대통령에 대한 탄압은 한층 더 높아졌다. 광조항쟁 이후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난 그는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대중경제론은 몇 번의 수정과정을 거치게 된다.
1983년 가을부터 1984년 여름까지 하바드대학 국제문제연구소 초청연구원으로 있던 김 전대통령은 영문으로 논문을 제출했고, 이것이 1985년 ‘대중참여경제론(Mass-Participatory Economy-A Democratic Alternative for Korea)’란 제목으로 출판된다. 그 뒤 10여년이 지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대중경제론은 ‘대중참여경제론’이라는 수정본으로 다시 출판됐다. 이 책은 1985년의 영문 논문을 개정 증보한 것이었다.
대중경제론이 다른 어떤 경제서적과 궤를 달리하는 것은 ‘국민의 정부’시절, 실제 경제 운용의 교과서 역할을 하면서 수정 및 성장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한국경제의 새로운 도약 발판을 마련하면서 막상 대중경제론의 초심은 많이 희석됐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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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 기자 bobo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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