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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우의 경제레터] 천둥번개가 칠 땐 도둑도 정직해 진다는데...

시계아이콘02분 57초 소요

1960년대. 그때 저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봤습니다.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이 창경원과 장충체육관이었습니다. 창경원에는 평소 보지 못했던 코끼리와 낙타, 호랑이가 있었고 장충체육관에선 심심찮게 권투와 레슬링경기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창경원보다 더 매력적인 곳은 장충체육관이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투혼을 불태우며 주먹을 주고받던 권투경기. 정말 흥미진진했습니다. 땀이 범벅이 된 김기수 선수가 챔피언 벨트를 매고 기뻐했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함께 싸웠던 선수가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였을 겁니다.

권투경기뿐입니까? 레슬링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였습니다. 김일과 장영철 선수. 그들은 박치기로, 때로는 드롭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며 가난의 시름을 잊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가서 직접 경기를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옆집 담 너머로 그것도 보일 듯 말 듯 하는 흑백TV 중계방송을 훔쳐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곳은 가난했던 시절 우리민족의 애환이 서린 곳이었습니다. 권투로, 레슬링으로 가난에 찌든 마음을 달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장충체육관이지만 아쉬움도 있습니다. 순수한 우리 기술과 우리의 힘으로 건설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963년. 장충체육관이 건립될 당시 우리의 건축기술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우리 손으로 체육관하나 제대로 지을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돔식의 실내체육관 건설을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손을 내민 곳은 필리핀이었습니다. 필리핀 기술진의 부분 설계와 감리 덕분에 장충체육관은 건립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건설사들이 중동에서, 아시아에서 건설로 벌어들이는 외화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정말 세상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격세지감(隔世之感)-그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한때 필리핀은 이처럼 기술력이 우리보다 앞섰고 또 잘 살았습니다. 미스코리아 당선자가 필리핀의 돈 많은 갑부에게 시집을 갔다 해서 화제가 된 적도 있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으로 따져도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 다음으로 높을 만큼 잘 나갔습니다. 1960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필리핀이 200달러나 됐지만 우리는 7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마르코스 정권시절에는 월남전 파병을 요구하는 미국에 당당하게 ‘노(No)’를 외칠 만큼 무서울 게 없었던 나라였습니다. 파병을 하고 나서도 파병군인의 월급이 미국 군인들과 비슷했습니다. 우리는 필리핀 전투병의 3분의 1 정도 되는 월급을 받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돈 꾸러 갔다가 거절당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으며 못 살던 때의 설움을 떠올려 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의 필리핀 국민소득은 겨우 1800달러. 우리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지금의 마닐라국제공항은 어떻습니까? 우리보다 약 20년 정도 뒤떨어져 있습니다. 김포공항 건설하는데 필리핀의 도움을 받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역시 돌고 도는 게 역사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한국이 잘 삽니까? 필리핀이 잘 삽니까? 아침부터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 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무슨 소리냐, 웬 말도 안되는 뚱딴지같은 질문을 하느냐며 웃어버릴 일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잘 살기 때문입니다. 가정부를 수출하는 곳도 필리핀이고, 산업현장의 근로자를 보내주는 곳도 필리핀입니다. 농촌이 싫다며 외면당하는 ‘한국노총각의 아내’자리도 그들이 메워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20대의 젊은 나이, 대학까지 나온 필리핀 처녀들이 ‘한국으로, 한국으로’ 오기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곳의 대학출신들이 한국에 오기위해 엄청난 돈을 뇌물로 쓴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것을 보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보다 잘 살고 그들보다 선진국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한국이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한류의 열풍속에서 드라마에 비친 한국은 낙원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관광가는 한국인들은 잘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일 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역사는 계속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영원히 잘사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영원히 못사는 나라도 없었습니다. 로마의 과거가 그랬고 중국의 과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때 로마는 유럽대륙의 좋은 땅을 모두 차지했습니다. 오죽하면 너무 커진 땅을 관리할 병사들이 모자랐겠습니까? 농사짓는 평민들도 귀족의 생활을 할 정도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명성도 영원하지는 못했습니다. 로마제국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붕괴에 이르기까지에는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과정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 대열에 들어 서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이런 상황이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분명한 것은 변하지 않으면, 더 잘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영원히 잘나가는 한국으로 남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경제대국을 향한 문턱에서 계속 뒷걸음질치고 있는 경제지표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위기의 중앙에 서 있으면서 위기를 낭비하고 있는 정치권의 행태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세계은행 발표를 보면 그런 우려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제규모는 세계 15위로 계속 뒤처지고 있습니다. 최근 5년을 기준으로 할 경우 경제규모 순위는 브라질, 러시아 등 인구 및 자원 대국에 밀려 4계단이나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정치권은 정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쌍용차문제를 비롯해 곳곳에 꼬여있는 매듭을 보면서 다시 빈국의 대열에 들어서기 위한 예행연습을 하는 듯한 우려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계해야할 가장 큰 위기의 징후는 위기를 낭비하는 것입니다. 이를 보며 적지 않은 사람들은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숲의 밖에서 숲을 바라보며 잘사는 연습을 하는 모습이 아쉬운 때입니다.



다시 시계를 40~50년 전으로 되돌려봅니다. 그때 우리는 지구상에서 손꼽힐 정도로 가난한 나라 대열에 끼어 있었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들이대며 싸워야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잿더미 속에서 가난과 싸워야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우리는 필리핀을 부러워했습니다. 가난했던 한국, 잘 나가던 필리핀. 1960년대 한국과 필리핀의 모습은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 입장은 바뀌었습니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경제대국의 꿈을 키워왔기에 그런 기적이 가능했습니다.

현대사의 明과 暗을 가장 확실하게 볼 수 있는 필리핀과 한국의 모습에서 오늘을 사는 지혜를 찾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가야할 길도 보일 것입니다. 천둥번개가 치면 도둑도 정직해 진다는데 지금 밖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귀를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권대우 아시아경제신문·이코노믹리뷰 회장 president@asiaeconom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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