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믿음기자
이수그룹의 문화예술 공간 '스페이스 이수'가 신진 작가를 조명하는 기획전 'VHS(Very High Signals)'를 통해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감각을 제안한다. 문화유산이나 완결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대신, 감각의 미세한 변화를 호출하는 이번 전시는 '보는 전시'의 관습에서 벗어나 일상 공간 속에서 작동하는 예술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고대영, '파피옹'(2025). 스페이스 이수 제공
이번 전시는 오는 3월20일까지 서울 스페이스 이수에서 열리며, 고대영, 최선아, 홍애린 등 1990년대생 작가 3인이 참여한다. 외부 기획자 전효경이 전시를 맡았으며, 스페이스 이수가 2026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신진 작가 지원 프로그램의 출발점이 되는 전시다. 세 작가는 모두 국내외에서 꾸준히 작업을 이어왔지만, 단체전 형태로는 소개된 사례가 많지 않은 신진 작가들이다.
전시 제목 'VHS'는 'Very High Signals'의 약자로, 전시 공간 안에서 희미하게 감지되는 고주파 신호를 의미한다. 작품들은 로비 공간에 내재된 질서와 기대, 반복되는 동선을 미묘하게 교란하며 소리와 진동, 물질적 개입을 통해 감각의 균열을 만든다. 회사 로비라는 장소는 임직원에게는 일상 공간이자 가장 빈번히 전시를 마주하는 장소로 설정되며, 전시는 2개월에 걸쳐 인식되거나 인식되지 않는 방식으로 서서히 변주된다.
이번 전시는 시각 중심의 감상 방식에도 질문을 던진다. 작품들은 명확한 '볼거리'를 제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를 자각하게 만든다. 전시는 '응시할 곳 없음'의 상태를 통해 관람자가 스스로 감각의 작동 범위를 선택하도록 유도한다.
참여 작가 최선아는 물질과의 긴 밀착 과정을 통해 조각과 설치 작업을 선보인다. '진지바'는 스컬피를 건물 외벽 유리면에 덮어 구조를 잇는 근육처럼 배치한 작업으로, 차가운 건축 구조에 점성과 유연성을 부여한다. 햇빛을 재료 삼아 물질의 밀도를 조절하고, 멀리서 보면 증식하는 균사체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는 손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무를 조각한 '슬리드(Slid)'는 보다 절제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며, 물성의 대비를 통해 공간 안에서 다른 긴장을 형성한다.
홍애린, '브랫(Brat)'(2026). 스페이스 이수 제공
홍애린은 소리와 장치, 복화술적 구조를 활용해 의미의 전이를 다룬다. '뮤직 사이렌'은 과거 전쟁의 기억을 환기하는 사이렌을 멜로디로 전환하려 했던 역사적 장치에서 출발해, 작은 장난감 나비의 진동을 증폭된 피아노 소리로 변환한다. 이 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불안한 감각을 호출하며, 과도하게 증폭된 생동이 결국 아무것도 아님을 드러내는 순간을 만든다. 또한 컴퓨터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 2'를 참조한 '브랫'은 양육과 통제의 시스템이 붕괴된 '빈 방'을 이미지로 제시하며, 관람자의 기억과 문화적 경험을 환기한다.
고대영은 영상과 기술을 통해 기억과 속도의 문제를 탐구한다. 영상 작업 '파피용(le papillon)'은 주변 인물과 주고받은 서신적 관계를 바탕으로 제작됐으며, 기존 영상 이미지를 인공지능(AI) 기술로 대폭 확대한 뒤 인공적으로 보정해 낯선 질감을 만들어낸다. 이는 개인적 기억을 허구적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과정이자, 친밀함과 거리감이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또한 F1 경기에서 사용되는 보호 장치 '헤일로'를 전시장에 가져와, 기능을 상실한 구조물의 형태만을 제시함으로써 속도와 신체, 기술의 관계를 사유하게 한다.
전시와 연계해 오는 17일에는 고대영의 무성 영상 '파피용'을 중심으로 한 퍼포먼스가 열린다. 이민휘와 최태현이 참여하는 라이브 공연은 전통 무성영화 상영 방식을 차용해, 영상의 흐름에 맞춰 음악이 실시간으로 연주된다. 공연 이후에는 현장 녹음 사운드가 전시 기간 영상과 함께 재생될 예정이다.
'VHS(Very High Signals)'는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한 평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공연 티켓은 별도 판매되며, 전시와 관련한 자세한 정보는 스페이스 이수 공식 웹사이트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