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김평화기자
물가 상승률을 반영한 실질 임금 기반으로 소득세를 매겨야 한다는 '물가연동제' 요구가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당장 도입하기가 어렵다는 입장이다. 소득세 실효세율이 비교적 낮은 데다 최근 대규모 세수 감소가 있던 상황에서 부담이 커질 수 있어서다. 세수 원칙에 따라 중장기적으로 도입을 추진하되, 조세 감면을 정비하는 등 세수 확보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전문가 조언이 나온다.
8일 기획재정부와 국세청, 국회 등에 따르면 소득세 물가연동제 도입과 관련한 요구가 지속하고 있다. 소득세 물가연동제는 물가 상승 정도에 따라 과세 표준(과표) 구간 및 공제액 등을 자동 조정해 실질 소득에 맞춰 세금을 매기는 것을 뜻한다. 현재처럼 누진세 기반으로 과표 구간을 두면 물가 상승으로 임금이 오를 때 사실상 자연 증세가 이뤄져 납세자의 세 부담이 늘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데 목적을 둔다.
지난달 서울 광화문역 인근에서 시민들이 출근하는 모습. 연합뉴스
물가연동제는 특히 근로소득세를 중심으로 도입 요구가 잇따르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지난 4일 근로자 임금보다 근로소득세와 사회보험료 증가율이 높다며 도입 필요성을 주장했다. 근로자 월평균 임금이 2020년에서 올해로 오면서 5년 사이에 연평균 3.3% 늘어나는 데 그친 반면 월급에서 원천 징수되는 근로소득세와 사회보험료 합이 연평균 5.9% 증가했다고 밝혔다.
국회에서도 관련 논의가 이어지는 모습이다. 이인선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0월 전체 근로자 중 6% 세율을 적용받는 비중이 2010년 76%에서 2022년 43.2%로 줄었지만 15% 세율 비중은 20.2%에서 43.4%로 늘었다며 세 부담 완화를 위해 물가연동제 도입을 요구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박범계, 노웅래 의원은 물가연동제 도입을 위한 소득세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다수는 이미 물가연동제를 도입한 상태다. 미국은 소득세 과표 구간과 표준 공제액 등을 물가에 연동해 조정하고 있다. 캐나다는 소비자물가지수(CPI)와 연동한 소득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 밖에 호주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 유럽 주요 국가도 인플레이션 등 물가 상황에 따라 소득세를 달리 두는 상황이다.
반면 정부는 도입이 시급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간 각종 조세 감면 등으로 세 부담을 낮춘 데다 소득세 실효세율이 다른 국가보다 비교적 낮다는 이유에서다. 소득세 중 근로소득세만 떼서 과표 구간을 수정하는 등 물가 연동을 하기 어려운 제도상 한계도 있다. 무엇보다 최근 몇 년간 세수 결손이 대규모로 이뤄진 상황에서 당장 물가연동제를 도입하면 세수가 크게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이 우려 요인으로 꼽힌다.
정부 관계자는 "그간 과표 구간 조정 및 공제 확대 등으로 세 부담을 완화해왔다"며 "우리 상황상 물가연동제는 중장기 검토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선진국처럼 소득세가 충분하다면 고려해야겠지만 지금은 그럴 단계가 아니다"라고 했다. 앞서 임광현 국세청장은 지난 10월 "물가연동제는 공제 등 개편 작업을 같이해야 하는 중장기 과제"라고 짚은 바 있다.
실제 OECD 통계를 보면 자녀가 없는 독신 가구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소득세 실효세율 평균은 지난해 6.91%였다. 이는 OECD 평균(15.39%)보다 8.48%포인트, G7 평균(16.12%)보다 9.21%포인트 낮은 수준이다. 우리와 경제 규모가 유사한 캐나다(18.92%), 호주(25.32%), 스페인(16.02%)뿐만 아니라 주요국인 미국(16.74%), 일본(7.30%) 등보다도 낮았다.
전문가들은 현 세수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곧바로 물가연동제를 도입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맞다고 평가했다. 다만 실질 과세의 공정성, 조세 원칙 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물가연동제 추진을 위한 중장기 과제를 단계별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과표 구간 개선뿐 아니라 면세자와 조세 특례를 줄이는 등 적극적인 세수 확보 방안도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박훈 한국세법학회장(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은 "미국 사례나 이론적 근거를 보면 물가연동제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면서도 "세수 감소 부담과 조세 부담률이 OECD보다 낮은 점 등을 보면 시행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바람직한 방향을 위해서는 결국 실질 소득에 따른 과세 원칙으로 가는 게 맞다"며 "구간을 추가로 조정하거나 공제를 바꾸는 방식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안창남 월드텍스연구회장(전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은 "정액 기준인 소득세 과세 표준 부과를 물가 연동에 비례해서 적용한다고 명시하면 매년 세법을 개정하지 않고도 (물가와 연동한) 조정이 가능할 것"이라며 "실효세율이 낮은 점은 정부가 세율을 올려야 하고, 조세특례제한법에 있는 조세 감면을 축소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