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영기자
이재명 대통령이 전임 정부의 비밀 대북전단(심리전) 작전과 관련해 북한에 사과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면서도, 국내 정치권의 '종북몰이' 공세를 우려해 못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북미 간 대화 여건 조성에 필요하다면 한미연합훈련을 축소 등을 논의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도 내놨다.
연합뉴스
이 대통령은 3일 오전 서울 청와대 영빈관에서 '계엄 1년'을 계기로 연 외신 기자회견에서 한 외신기자가 '전 대통령이 은밀한 대북 전단 작전을 벌여 한반도를 전쟁 직전까지 몰고 갔다고 이 대통령이 소셜미디어(SNS)에서 말했다. 남북 긴장 완화를 위해 국가 차원의 사과를 할 의향이 있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이 대통령은 "어떻게 제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모르겠다. 차마 말을 못 하고 있다"고 운을 뗐다. 이어 "저는 사과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하면서도, 자칫 잘못하면 이게 소위 우리 말로 하면 종북몰이, 정치적 이념 대결의 소재가 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돼서 차마 말을 못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개 석상에서 대북 '사과 필요성'을 직접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대통령은 다만 "그냥 이 정도로 끝내겠다"며 구체적인 사과 방식이나 시점, 형식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국가 차원의 사과'라는 표현을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전임 정부의 대북 공작에 대해 남북관계 차원의 책임을 언급한 만큼 향후 행보에 이목이 쏠릴 전망이다.
아울러 이 대통령은 '페이스메이커' 구상에 대해 "지금 남북 대화는 바늘구멍조차 없이 완전히 단절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일방적 유화 조치뿐"이라며 "체제 보장을 해줄 수 있는 핵심 당사자는 미국이라고 북한은 인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평화에 대한 의지도 강하고 또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역할도 크다"면서 "북미 대화를 위한 제반 조건 중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협력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북미 대화에 도움 된다면 한미연합훈련을 축소하는 논의도 할 수 있다는 취지의 답변도 했다. 이 대통령은 한미연합훈련 문제도 필요하다면, 미국의 전략적 레버리지에 도움이 된다면 논의하고 고민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자체가 협상 여건을 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우리는 끊임없이 환경을 조성하는 조정자로서 역할을 해야 하고, 그것이 우리가 주체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했다.
연합뉴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올해 가졌던 두 차례 정상회담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로 핵추진 잠수함을 확보하게 됐다는 점을 꼽았다. 이 대통령은 "전략적 유연성과 자율성 측면에서 볼 때 우리로서는 매우 유용한 결과"라고 말했다. 잠수함 건조 장소와 관련해서는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하는 게 어떠냐고 얘기했지만, 우리 관점에서 보면 이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라며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이 경제적 측면과 군사 안보적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고 답변했다.
핵추진잠수함 도입을 위해 한미 정상이 합의한 한국의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권한 확대와 관련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핵 재처리 또는 우라늄 농축을 한국이 자체 생산하고 5 대 5로 동업하자고 했다는 점도 공개했다.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승인한다는 명확하게 밝혔다"면서 "핵 재처리, 우라늄 농축은 러시아에서 30%가량 수입한다고 했더니 트럼프 대통령이 '자체 생산하면 많이 남겠다. 5 대 5 로 동업하자'고 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먼저 이런 제안을 하고 동업 역할을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 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 대통령은 한국의 핵무장론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외신 기자가 핵추진 잠수함·핵연료주기 협력 문제를 거론하며 "비확산 규범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하자, 이 대통령은 "우리는 핵무장을 하지 않는다. 핵무장을 추진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이어 이 대통령은 "핵 비확산은 국제적 대원칙이고, 한반도 비핵화는 남북이 기본적으로 합의한 대원칙"이라며 "우리가 핵무장을 하면 북한에 '핵무기 폐기하라, 더 이상 만들지 말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또 "한국이 핵무장을 하면 일본·대만 등으로 '핵 도미노' 현상을 부르게 되고, 엄청난 제재를 감수해야 한다"며 "비상식적인 행동"이라고 일축했다.
핵추진 잠수함과 우라늄 농축·재처리 논란에 대해서는 비확산 규범에 위반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미국 내 우려를 의식해 "우리는 핵무장 의사도, 필요도 없다"는 점을 거듭 부각했다.
외교·안보 현안에 대한 질문도 이어졌다. 대만 유사시 일본에 대한 지지 여부와 관련해 일본·중국 갈등 구도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이 대통령은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말이 있다"며 "한쪽 편을 드는 것은 갈등을 격화시키는 요인"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동북아는 경제적으로는 활력이 있지만, 군사·안보 측면에서는 매우 위험한 지역"이라며 "공통점을 찾아 협력하고, 우리가 갈등을 최소화하고 중재·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 역할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독도·사도광산 등 과거사·영토 갈등을 언급하며 "문제가 있다고 해서 모든 관계를 단절하면 결국 나 혼자 남게 된다"며 "과거사는 과제대로 해결해 가되, 경제·안보·문화 등에서 할 수 있는 협력은 계속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일 셔틀외교에 대해서도 "계속 추진해야 한다"며 "제가 방문할 차례이기 때문에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고향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 대해서는 "한중 관계를 재설정하고 새로 발전시키는 좋은 계기가 됐다"며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중국을 방문해 충분한 시간 동안 여러 분야를 폭넓게 논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만 "올해 방중을 희망했지만 중국 내부 사정상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했다.
러시아·북러 관계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불법 침공으로 국제 제재가 이어지고 있어 한국도 제재에 참여하고 있다"며 "북러 관계가 우리 입장에서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고 더 나빠지지 않도록, 더 나은 상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연합뉴스
이 대통령은 'K-민주주의'의 특징을 묻는 말에는 '집단지성에 의한 평화적 직접 민주주의'를 키워드로 제시했다. 그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독특함이 있다"며 "국민이 맡기지 않고 직접 행동하지만 폭력적이지 않고, 평화적이고 아름답게 행동한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수십만, 수백만이 모여도 유리창 하나 깨지지 않고, 촛불혁명 때도 폭력행위가 없었다"며 "현실의 권력을 민중의 무혈 평화 행동으로 끌어내린 사례는 세계사적으로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앞서 특별성명에서 밝힌 "대한국민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재차 밝힌 셈이다.
이 대통령은 "아테네 민주주의는 먼 이상 속에 있지만,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지금 현실 속에 있는 모범"이라며 "대한민국의 힘은 민주주의에서 왔다. 사람을 귀히 여기고, 주권의식이 충만한 국민이 비민주적 시스템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마무리하면서 "이번 내란 사태를 겪으며 광주민주화운동 때 언론 통제와 왜곡 보도로 진실이 가려졌던 기억이 떠올랐다"며 "당시 광주의 실상을 알린 건 외신 사진기자들의 보도였다. 이번에도 국내외 언론이 적극적으로 사실을 전해준 덕분에 국민이 주권자로서 직접 행동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K-민주주의의 현장을 세계 시민에게 잘 전해 달라"며 외신 기자들에게 거듭 감사의 뜻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