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훈기자
반도체와 배터리 등 첨단 제조 산업이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계기로 공급망을 분리하고 있지만, 바이오 분야에서는 오히려 중국과의 협력이 강화되고 있다. 기술·시장·임상 데이터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산업 구조 때문이다.
5일 미국 투자은행 제퍼리스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 세계 제약·바이오 기술이전 거래 가운데 중국 제약·바이오기업이 차지한 비중은 32%에 달했다. 올해 상반기 중국 제약기업들의 기술수출 규모는 660억달러(약 95조원)로 지난해 전체 522억달러(약 75조원)를 이미 뛰어넘었다.
반도체·배터리 등 여타 첨단산업의 글로벌 공급망·협력 관계에서 중국이 배제되는 것과는 정 반대의 양상이다. 이같은 차이의 배경에는 제약바이오 산업 특유의 원리가 자리하고 있다. 반도체·배터리가 소재·부품·장비 중심의 공급망 산업이라면, 제약바이오는 지식·임상 기반의 산업이다. 데이터와 기술이 가치의 원천이다. 물리적 공급망과 관련해 미국 주도의 엄격한 중국 배제 전략이 적용되고 있지만 데이터나 기술 등 '보이지 않는 공급망'에 대해서는 제재 기준이나 근거가 부족하다. 이렇다할 제재 수단도 아직 없다. 미국이 중국·러시아 등 '우려 국가'의 생명공학기업 협력을 규제하는 '생물보안법' 입법을 추진하고 있지만 미국 내에서도 임상 지연과 혼선 등을 이유로 입법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국내 기업들도 중국을 협력 파트너로 주목하고 있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지난달 중국 프론트라인바이오파마와 항체-약물접합체(ADC) 신약 2종을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프론트라인의 이중항체·이중페이로드 기술을 기반으로 두 개의 파이프라인을 함께 개발하고, 일부 독점 라이선스를 확보했다. GC셀은 중국 난징의 IASO바이오로부터 다발성골수종 치료제 '푸카소(Fucaso)'를 도입했다. 푸카소는 세계 최초의 완전 인간 유래 BCMA(B세포 성숙 항원) CAR-T 치료제로, 이미 중국에서 허가돼 환자 투여가 진행 중이다.
이외에도 에이비엘바이오·리가켐바이오·지아이이노베이션 등 바이오벤처들이 중국 기업들과 잇따라 협력 중이다. 에이비엘바이오는 아이맵바이오파마와 4억달러(약 5776억원) 규모의 이중항체 항암신약 공동개발 계약을 체결했고, 지아이이노베이션은 심시어파마슈티컬과 면역항암제 'GI-101' 중국 독점 계약을 맺었다. 리가켐바이오는 시스톤파마슈티컬에 자사 ADC(항체-약물 접합체) 후보물질 'LCB71' 기술을 이전해 현지 임상 1상을 진행 중이다.
중국의 제약바이오 시장은 2500억달러(약 340조원) 규모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정부의 '중국제조 2025' 전략 아래 바이오가 핵심 산업으로 지정됐고 대형 병원을 중심으로 임상 인프라가 빠르게 확충되는 가운데 중국 국가약품감독관리국(NMPA)은 신약 심사 기간을 절반으로 단축했다. 14억 인구의 환자 풀은 희귀질환이나 특정 암종 임상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제공한다.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글로벌 제약 시장에서 빅파마들은 '기술과 속도'를 이유로 중국과 손잡고 있다. 일본 다케다제약은 이노벤트바이오로직스와 16조원 규모의 ADC 공동개발 계약을 체결했고, GSK는 헝루이제약과 17조원 규모의 신약 협력 계약을 맺었다. 리스크도 적지는 않다. 중국 내 지식재산권(IP) 보호 문제와 미·중 갈등 등 지정학적 리스크, 임상 데이터 신뢰성은 여전히 변수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은 더 이상 생산기지가 아니라 혁신 중심으로 재편된 시장"이라며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기술 독립성과 협력 균형을 동시에 추구할 때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