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MP 칼럼]트럼프의 질책과 불안한 미국 외교

'외교 성지' 지위 잃어가는 백악관
라마포사 등 정상들 공개 망신당해
취약한 국가일수록 냉대 넘어 적대

전통적 외교 성지로 꼽혀온 백악관 집무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집권 이후 바뀌고 있다. 한때 전 세계의 연대를 이끌고 주요 과제를 논의하기 위한 최고의 무대였던 이 공간은 외국 정상들에게 '초청장'이 아닌 '덫'이 되고 있다. 한번 발을 들인 외국 지도자들은 공개 망신을 당하거나 자국 국익을 훼손당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른바 국제 정치판 '헝거게임'이다.

최근에는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미국과의 정상회담 중 공개 망신의 희생자가 됐다. 이달 21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백인 학살과 남아공의 토지 몰수에 관한 근거 없는 음모론을 증명한다며 증거 자료를 내밀었다. 많은 남아공 국민이 생명과 재산에 위협을 느껴 미국으로 피신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덧붙였다.

라마포사 대통령의 얼굴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는 곧 냉정을 유지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근거 없는 주장에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는 남아공 헌법이 보장하는 토지 소유권을 강조하며 자국에서 발생하는 폭력 범죄의 대다수 피해자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적시했다. 당초 투자·무역 증진을 위한 건설적 대화가 될 뻔했던 이번 회담은 순식간에 긴장 섞인 대치 상황으로 전락했다.

과연 이런 만남은 처음일까. 오히려 반대다. 이는 트럼프식 집무실 외교의 일관된 패턴이자 연속적인 우려의 연장선상으로 봄 직한 장면이었다. 이는 지난 2월 28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미국에서 겪은 가혹한 '심문식 면담'을 연상시킨다.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핵심 광물 자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광물협정에 서명하라고 압박했다. 이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대응 방식도 공개 비판했다. 그의 반응은 트럼프 대통령을 자극했고, 이로써 결국 양국 회담은 날 선 분위기 속에서 갑작스럽게 종료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외국 정상과 만날 때 상대를 불편하고 곤란한 입장으로 몰아넣는다.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은 가자지구 난민 수용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에 눈에 띄게 고전했다. 요르단이 미국 원조에 의존하는 현실 때문에 반박도 제대로 못 했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 역시 "캐나다는 매물로 나온 나라가 아니다"며 자주성을 강조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의 방위비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았다.

백악관 방문은 더 이상 외교적 인사와 의례가 오가는 평범한 일정이 아니다. 이제는 예측 불가능한 트럼프 대통령의 기분과 돌발 행동, 기습 공격 가능성을 헤쳐 나가야 하는 위험한 '퍼포먼스의 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반복되는 '공개 망신 쇼'는 미국 외교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으며, 음모론에 깊이 물들어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은 권력을 잡은 이후 국제 핵심 체계를 무너뜨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 파리기후변화협정이나 이란 핵 합의처럼 다자간 협정에서 일방적으로 미국을 탈퇴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같은 중대한 외교 현안과 관련해서도 시도 때도 없이 갑작스럽게 입장을 바꿨다.

더 나아가 트럼프 정부 시기의 미국 외교는 국내 정치적 이득을 위한 수단으로 심각하게 도구화됐다. 가장 분명한 예시는 우크라이나 원조를 '정치적 무기'로 활용한 사건이다. 국가 안보와 외교 전략의 핵심인 대외 원조조차 미국 내 정쟁을 위한 거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은 취약한 국가일수록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에서 냉대를 넘어 적대적인 대우를 받는다는 점이다. 미국 CNN 방송의 표현을 빌리자면 취약할수록 백악관의 환대는 더욱 적대적으로 된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이는 두 가지 문제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대외 원조 축소를 통한 미국의 책무감 약화이며, 다른 하나는 무역이라는 명분 아래 자원 착취를 시도하는 동시에 아프리카 주권 문제에 불필요하게 개입하려는 태도다.

복잡한 내부 과제를 안고 있는 국가들에 트럼프 대통령의 돌출 행동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이는 백인 민족주의 성향 유권자들을 비롯해 자국 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지지층을 겨냥한 '정치 쇼'에 불과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해외 지도자들을 생중계 속에서 몰아세우는 방식으로 '강한 미국'의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다. 이는 철저히 미국 내 정치용 퍼포먼스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같은 인물이 라마포사와의 회담에 배석한 사실은 이 외교 현장이 정책보다는 정치적 이익과 이해관계가 중심인 이벤트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젠루 비 시사평론가

이 글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의 칼럼 Trump's Oval Office smackdowns reflect alarming turn in US diplomacy를 아시아경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국제부 차민영 기자 blooming@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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