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기자
연상호 감독의 영화 '계시록'에서 성민찬(류준열)은 작은 도시에서 교회를 운영하는 목사다. 성범죄자 권양래(신민재)가 여중생 신아영(김보민)에 이어 자기 아들을 유괴했다고 의심해 야산에서 혈투를 벌인다. 권양래는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져 의식을 잃는다. 성민찬은 아들이 무사하단 소식을 듣고도 구조하지 않는다.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 맞은편 절벽에서 예수와 흡사한 형상을 보고 주저한다. 하느님으로부터 단죄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믿는다.
영화 '계시록' 스틸 컷
성민찬을 정신질환자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정신이 건강해도 이치에 맞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브랜던 아널드 하버드대학교 정신과 교수는 비합리적 확신이 예외보다 규칙에 가깝다고 설파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망상과 같은 이야기는 흔하다. (중략) 일반적 사고는 합리적이고 연역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 아니 대부분이 속으로 이상한 확신을 품고 있다. 신경정신과 의사들이 망상이라고 진단할 만한 생각을 말이다."
문제는 망상에 근거해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는 '평균 이상 효과'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더 도덕적이고 유능하며 호감이 간다고 착각한다. 성민찬도 다르지 않다.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받아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종된 신아영을 사망으로 단정하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추모 기도회를 진행한다. "아영이가 이미 천국에서 저희를 보고 있는 것을 압니다. 지금 괴로워하는 우리 어머니에게 아영이가 느낄 평화로움을 함께 느끼도록 허락하시옵소서."
종교적 믿음은 합리성의 원칙을 벗어나는 대표적 사례다. 인식론적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다. 합리적 논지나 증거를 끌어들여 설명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다. 리처드 도킨스 옥스퍼드대학교 명예교수는 "종교적 믿음에는 모든 증거가 결여돼 있다. 증거와 무관하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널리 크게 전파한다"고 밝혔다. 여기서 중요시되는 요인은 확증이나 증거가 아닌 선험적 확신이다. 진실로 받아들이는 신자에게 삶의 방향과 의지를 부여한다. 때로는 검증이 가능한 진실보다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영화 '계시록' 스틸 컷
그러나 선험적 확신으로 표방되는 신념에는 위험과 부작용이 따른다. 특히 종교를 빌미로 일어나는 전쟁은 지금도 수많은 희생자를 낳는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정치 이념을 지탱하는 동력으로 변질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가중한다. 단번에 청산하기는 불가능하다. 신아영이 살아있는데도 끝까지 죽었다고 믿는 성민찬처럼 열에 아홉이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연 감독은 정신과 전문의(김도영)의 입을 빌려 간절하게 호소한다. 어쩌면 해결책에 가까워질 수 있는 힌트일 수 있다. "이 세상의 비극은요, 대부분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복합적인 원인에서 발생합니다. 악마, 괴물 이런 것들 다, 인간이 스스로 편의에 의해 만들어내는 거예요. 우리, 보이는 것만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