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제일기자
지리산국립공원의 주봉인 천왕봉에서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을 애통해하며 광복의 날이 오기를 갈망하는 내용으로 바위에 새겨진 장문의 글이 발견됐다. 13일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공단은 지리산의 힘을 빌려 일제를 물리치고자 하는 의병의 염원을 새긴 바위 글씨를 지리산국립공원 천왕봉 바로 아래에 위치한 바위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바위 글씨는 1894년 전후 지리산에서 의병을 조직해 일제에 대항하려 했다고 전해지는 경남 합천 출신 권상순 의병장의 후손이 2021년도 9월에 발견한 뒤 국립공원공단에 지난해 11월에 조사를 요청해 확인됐다. 이 글은 천왕봉 바로 아래 자연석 바위에 392자의 한자로 새겨져 있으며, 글자가 새겨진 면적은 폭 4.2m, 높이 1.9m에 이른다. 지금까지 전국의 국립공원에서 확인된 근대 이전의 바위 글씨 190여개 가운데 가장 높은 지대(해발 1900m대)에 쓰여 있고 글자 수도 가장 많다.
국립공원공단 연구진은 글자가 마모돼 전문을 온전히 파악하기 힘든 이 바위 글씨를 3차원 스캔 작업으로 조사하고 전문을 탁본한 뒤 전문가에게 판독을 의뢰했다. 그 결과 구한말 문인 묵희(1875~1942)가 짓고 권륜이 써 1924년에 새긴 것임을 확인했다. 이 글은 중국 고전들에 나오는 오랑캐 침략 관련 고사를 언급한 뒤 "오늘날 천지가 크게 닫혔다고 하는데, 다시 열리는 기미는 언제쯤일까? 오랑캐를 크게 통일하여 문명이 밝게 빛나고 넓게 퍼져가는 날을 반드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울분과 원통함을 금치 못하고서 피를 토하고 울음을 삼키며 이 남악(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만세 천왕의 대일통을 기록한다. 아! 슬프다"라며 나라 잃은 슬픔을 비통해하는 말로 맺고 있다.
이 글을 국역한 최석기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부원장은 "천왕을 상징하는 지리산 천왕봉의 위엄을 빌어 오랑캐(일제)를 물리쳐 밝고 빛나는 세상이 오기를 갈망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비분강개한 어조로 토로한 것이 석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송형근 국립공원공단 이사장은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정상에서 일제에 대항한 의병과 관련된 바위 글씨가 발견된 것은 국립공원 문화유산의 가치를 높여주며, 지리산 인문학과 지역학 연구에 아주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