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곳 잃은 인문학]①덕성여대 독문·불문과 폐지 수순…인문학 붕괴 위험신호

내년부터 독문·불문과 신입생 미배정
대학 결정 과정 논란도 학내 갈등의 불씨

편집자주학문을 연구한다는 의미로 '상아탑'이라 불리던 대학에서 순수 인문학이 설 곳을 점점 잃고 있다. 최근 서울 소재 대학 중 덕성여대가 독문·불문과의 동시 폐지 수순을 밟으며 충격을 줬다. 대학의 '취업 사관학교'화와 함께 학령인구 감소, 대학 재정난 등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아시아경제는 대학의 인문학 쇠퇴 현실을 짚어보고 이에 대한 해법을 2회에 걸쳐 모색해본다.
따옴표“학생들 의견은 하나도 반영하지 않았어요. 이번이 시작일까 걱정입니다.”

지난달 25일 오후 찾은 서울 도봉구 덕성여자대학교. 중간고사 시험 준비에 여념 없는 학생들은 각자 무거운 책가방을 멘 채 바쁜 걸음으로 교정을 오가고 있었다. 학생들 사이로 보이는 인문사회과학대학 출입구 옆 벽면엔 ‘독불문 폐지 결사 반대’라고 적힌 현수막이 쓸쓸하게 걸려있었다.

덕성여대 인문사회과학대학 건물 벽에 '독불문 폐지 결사반대'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사진=심성아 기자]

학교법인 덕성학원 이사회는 지난달 23일 2025학년도부터 독어독문학과와 불어불문학과에 신입생을 배정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두 학과 모두 사실상 폐지 수순을 밟게 됐다. 자유전공학부 신입생을 포함해 내년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독문·불문과를 선택할 수조차 없다. 덕성여대 관계자는 “대학 전공 평가 기준에 따라 종합적으로 평가해 최하위 2개 학과를 폐지했다”며 “학교가 장기적으로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독문·불문과가 속한 글로벌융합대학 학생들은 2학년이 되면 전공 학과를 선택하는데, 그동안 독문·불문과 지원이 극히 적었다는 게 학교 측의 설명이다. 실제로 올해 독문과의 경우 2명, 불문과는 8명의 학생이 모집됐다.

학교 측에 따르면 대학은 자체적으로 마련한 대학 전공 평가 기준에 따라 최하위 점수를 받은 2개 학과를 없앨 수 있다. 대학은 교수와 학과 전체의 성과, 과 이탈률, 전공 심화를 선택하는 학생 수, 다른 학교로 이적한 학생 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평가한다. 해당 관계자는 “2020년에 자유전공학부 제도를 시작했는데 두 과는 계속해서 수요가 없었다”며 “덕성여대같이 소규모 대학에서 과연 그런 과들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이러한 학교 방침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불문과 학생회는 총장과 면담을 진행했으나 총장의 ‘불문과 폐지’라는 일방적 통보만 있었을 뿐, 소통이 불가능했다며 지난해 공개적으로 입장문을 게재한 바 있다. 불어불문학과 학생회장은 “‘학생은 소비자이며,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바뀌는 것이 학교’라는 총장의 일방적 설명으로 면담이 끝났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덕성여대 민주덕성 비상대책위원회에서 3월 학생회관 건물 벽 한쪽에 부착한 대자보 앞으로 한 학생이 지나가고 있다.[사진=심성아 기자]

불문과 3학년 조나연씨(21)는 “불문과 수업을 들으면서 적성을 찾아 진로 계획을 짜놨는데 과가 폐지된다는 소식을 듣고 의욕이 떨어졌고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라며 “지금이야 독문·불문과지만 나중에는 다른 비인기과도 없어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토로했다.

사태를 관망할 수밖에 없는 타 학과 학생들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사회과학대 학생 이정윤씨(25)는 “대학은 단지 취업만을 목표로 하는 곳이 아니고 공부하는 곳”이라며 “어문계열을 이렇게 성급하게 없애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윤모씨(21)도 “경영난이라는 건 핑곗거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김건희 덕성여대 총장은 지난해 6월과 올해 2월, 두 학과의 신입생 미배정 계획을 담은 학칙 개정안을 공고했다. 두 번의 공고 모두 대학 운영과 관련한 심의·자문을 하는 대학평의원회에서 부결됐으나, 한 달여 만인 지난달 26일 같은 내용의 학칙 개정안이 재차 공고됐다. 결국 이달 5일 열린 대학평의원회에서 찬성 7표, 반대 5표로 가결됐다.

덕성여대 인문대학의 한 교수는 “두 번이나 부결됐음에도 폐기하지 않고 똑같은 사항을 세 번이나 투표한 건 반민주적”이라며 “덕성여대 캐치프레이즈가 ‘민주 덕성’인데 ‘반민주 덕성’이 됐다”고 한탄했다. 그는 “마치 보따리장수가 ‘인문학 상품’이 안 팔린다고 다른 상품으로 파는 격”이라며 “대학의 학문이 장사하듯 판매하는 상품이 돼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덕성여대 독문·불문과 사태가 인문학과 폐지의 결정적인 신호탄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덕성여대 인문대학의 한 교수는 “덕성여대는 100년 이상 된 대학”이라며 “이런 대학이 독문·불문과를 아무런 장치 없이 그냥 폐지하는 것은 전국적으로 ‘인문학은 없애도 되는 학문’이라는 신호탄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회부 심성아 기자 heart@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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