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민재기자
KB국민은행 전·현직 직원들이 임금피크제를 근로자에게 불이익하게 변경하면서도 근로자 동의를 받지 않았다며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임금 및 퇴직금 청구 소송 1심에서 승소했다. 임금피크제 관련 취업규칙을 변경할 때 근로기준법이 정한 엄격한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1심 판결이 나온 만큼 유사한 쟁점으로 소송 중인 현대차와 기아의 고민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남부지법 민사15부(재판장 이진화)는 지난 8일 KB국민은행 전·현직 직원 135명이 낸 229억원 규모의 임금 및 퇴직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국민은행은 ‘정년연장형’이던 임금피크제를 ‘정년유지형’으로 변경해 근로자들의 근로조건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불이익하게 변경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의 동의를 받지 않고 이를 변경해 무효”라고 판시했다.
앞서 국민은행 근로자들은 회사가 도입한 임금피크제가 무효라며 임금 및 퇴직금 229억원가량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냈다. 국민은행은 노조와 합의에 따라 2008년부터 임금피크제(1차)를 실시해왔고, 58세 정년을 60세 정년으로 연장해 임금피크제를 실시해달라는 노조의 요구대로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가 실시돼왔다. 그러나 회사는 2015년부터 임금피크제(2차)를 변경했다. 개정된 인사운영지침에 ‘정년을 연장하여’라는 문구가 빠지면서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1차)가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2차)’로 변경된 것이다.
이에 근로자들은 회사가 개정한 임금피크제가 정년을 연장하지 않는 ‘정년유지형’인 만큼 근로조건의 불리한 변경임에도 노조의 동의를 받지 않아 무효라고 주장했다. 근로기준법은 사용자가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이익하게 변경하는 경우 근로자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의 동의나 근로자 과반의 동의를 받도록 규정하는데 회사의 취업규칙 변경이 이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반면 국민은행은 “2차는 고령자고용법 시행으로 정년이 개정됐을 뿐 1차와 근본적으로 같은 만큼 근로자들의 근로조건을 불이익하게 변경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근로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임금피크제 정의 규정을 변경한 것이 취업규칙의 불이익한 변경이라고 봤다. 재판부는 “변경된 임금피크제 정의 규정은 임금피크제 실시를 ‘정년 연장’을 전제로 하는지에 차이가 있다”며 “정년 연장 여부와 무관하게 일정 연령이 되면 실시되는 임금피크제가 근로자에게 더 불리한 근로조건에 해당함은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회사는 임금피크제가 시행되지 않았다면 지급했을 수준의 임금 및 퇴직금, 지연손해금 등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1심 판결이 유사한 쟁점으로 소송 중인 현대차·기아의 재판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남부지법이 국민은행 임금피크제 무효 여부를 판단할 때 대법원 판례에 따라 집단적 동의를 거쳤는지를 먼저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근로자 측이 상대적으로 입증하기 까다로웠던 '임금피크제 시행이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연령차별이라는 점'에 대한 입증 부담이 줄었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 5일 기아 퇴직 간부 77명은 회사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총액 38억원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현대차 퇴직 간부 32명은 지난해 12월 이번 소송과 유사한 이유로 회사를 상대로 16억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퇴직 간부 측은 공통적으로 회사가 간부사원 취업규칙을 개정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는데, 이 과정에서 노조 동의를 받지 않은 만큼 취업규칙 변경이 무효라고 주장한다.
류재율 법무법인 중심 변호사는 국민은행 임금피크제 판결에 관해 “과거 임금피크제에 대해 근로자들 측에서는 ‘취업규칙의 불이익한 변경’으로 무효라는 쟁점과 ‘고령자고용법에 위반되는 연령차별’로 무효라는 두 가지 쟁점 모두를 근로자들 측에서 주장했었다”며 “하지만 근로자들 측에서 본인 회사에서 시행되는 임금피크제가 연령을 이유로 한 차별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고까지 입증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고 입증에 부담이 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법원의 논리에 따른다면 이제는 임금피크제를 취업규칙으로 도입한 사례에서는 임금피크제의 도입이 근로자들에게 불이익한 변경이기만 하면 대법원 판례에 따라 집단적 동의를 거쳤는지만 판단해 그러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면 임금피크제를 무효로 보게 된다”며 “작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인해 임금피크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는데 법리적으로는 사측의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 분명해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간 대법원은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이익하게 변경하면서 동의를 받지 않은 경우라도 ‘사회 통념상 합리성’이 있다면 예외적으로 변경된 취업규칙의 효력을 인정하는 판례를 다수 내놨었다. 하지만 지난해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내놓으면서 45년 만에 기존 판례를 뒤집었다. 노동자 과반의 동의를 받지 않은 불리한 취업규칙 변경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는 취지다.
다만 국민은행 임금피크제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현대차·기아 임금피크제 재판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남부지법은 절차적 하자에 대해 판단했는데 기업별 동의 여부 사안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상태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국민은행의 경우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임금피크제가 무효로 판단 받았지만,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절차를 거쳤는지는 회사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번 판결이 업계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대해 최지수 법무법인 린 HR팀 변호사는 “개별 기업이 실제로 근로자들의 집단적 동의를 받았는지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근로자의 정년이 연장돼가는 추세에서 최초 정년연장형으로 도입됐던 임금피크제가 정년유지형으로 변경된 사례가 아주 드물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적어도 위 남부지법 사건과 유사한 사실관계하에 있는 근로자로서는 상대적으로 주장·입증이 어려웠던 요건에 대한 입증책임을 덜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