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거래' 은행의 배신…홍콩ELS 사태 일파만파

"내 돈 어쩌나" 들끓는 소비자들
집단소송 준비 움직임도
악재 겹친 은행들, ELS 판매 중단 선언

"25년 넘게 거래했던 은행인데 이제 그쪽은 보기도 싫어졌습니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직장인 이모씨(51)는 최근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 가입했던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상품의 만기가 내년 4월 돌아오면, 25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은 8억원이 절반 가까이 사라지게 생겼기 때문이다. A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오랜 기간 이용했던 그는 10년 넘게 거래하던 창구 직원의 권유로 홍콩H지수 ELS 상품에 가입했다.

본지와 만나 자신의 휴대폰에 있는 A은행 앱을 보여준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손실이 난 상황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앱에 들어가서도 여러 곳을 클릭한 뒤에야 손실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씨는 "은행에서는 먼저 전화도 없었고, 8월쯤 이 상황을 알고 따지자, 오히려 손실을 메꾸자며 관련 상품의 추가 가입을 권했다"며 "처음부터 손실이 날 수 있다고 미리 설명해줬더라면 금리 몇프로 더 받자고 전 재산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이라 안전하다고 믿었는데…소비자들 분통"

홍콩 H지수 ELS 상품 가입자들이 내년 대규모 원금 손실이 예상되면서 들끓고 있다. 이씨와 비슷한 시기에 가입한 이들은 "노후자금을 날리게 생겼다", "평생 모은 돈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며 단체 행동에 나섰다. 투자자들이 모인 네이버 카페는 개설된 지 1주일도 지나지 않아 가입자가 500명을 훌쩍 넘어섰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도 각종 투자 손실 사례들이 이어지고 있다. 고령층 등 손실 상황을 모르고 있던 투자자들이 추가 발생할 것을 감안하면 사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일파만파 커질 것으로 보인다.

ELS는 파생상품의 일종으로 기초자산의 가격이나 주가지수와 연계돼 수익률이 정해지는 증권이다. 만기 시까지 가격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면 수익이 발생하지만, '녹인(Knock In·원금손실 발생 구간)'에 진입하고 만기 시 최종 가격이 일정 이하가 되면 원금 손실이 발생한다. 홍콩 H지수는 홍콩에 상장된 중국 기업 주가로 구성됐는데, 최근 3년간 1만2000대에서 5000대로 폭락했다. 이씨처럼 2021년쯤 은행을 통해 관련 ELS 상품에 가입했던 이들은 내년 상반기 만기가 도래하면서 대규모 손실을 봐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에서 판매한 홍콩H지수 연계 ELS 중 내년 상반기 만기가 돌아오는 판매 잔액은 총 8조4100억원 규모로, 금융권에선 상품 구조와 현재 주가 수준을 고려하면 3조~4조원대 원금 손실을 예상한다.

"집단소송 준비 움직임도"

상황이 이렇게 되자, 소송을 준비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단체소송을 준비 중인 이정엽 법무법인 LKB&파트너스 변호사는 본지와 통화에서 "불완전판매가 일어났기 때문에 소송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청구를 계획 중인 상태"라며 "손해배상액은 보통 50%에서 시작해 정말 피해라고 여겨지면 취소가 가능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

향후 '불완전판매 여부', 금융소비자보호법상 '적합성의 원칙' 등이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소비자의 재산과 금융상품을 사고판 경험에 비추어 은행이 부적합한 금융상품을 권유하는 걸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지난달 29일 "고난도 상품이 다른 곳도 아닌 은행 창구에서 고령자들에게 특정 시기에 몰려 판매됐다는 것만으로 금소법상 ‘적합성의 원칙’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ELS 투자가 처음이 아닌 경우, 불완전판매나 적합성 원칙 위반이 인정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 변호사는 "무조건 투자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도 많이 투자했다가 이번에 실패한 경우는 좀 어려울 수도 있다. 설명 의무가 지켜지지 않은 사람들이 위주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난감한 은행권…줄줄이 판매 중단"

이자 장사 비판 속 상생 압박을 받았던 은행들은 이번엔 ELS 사태로 또 다른 악재에 직면했다. 소비자들의 원성이 커지고 있고 금융당국도 전수조사에 돌입했다. 은행권 관계자는 "지점에 모든 인력이 모두 완벽히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없겠지만, 관련 자격증이 있어야 판매할 수 있다"며 "다만 이 같은 (폭락) 상황은 애널리스트들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은행들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결국 홍콩H지수 ELS 판매 중단을 선언했다. KB국민은행은 전날부터 홍콩H지수 ELS 상품을 판매를 중단했고, 하나은행도 다음 달 4일부터 홍콩H지수 기초 주가연계펀드(ELF)·주가연계신탁(ELT) 상품 판매를 중단하기로 했다. 우리·신한은행은 지난해부터 홍콩H지수 편입 ELS 판매를 중단했으며, NH농협은행은 지난달부터 원금비보장형 ELS를 판매하지 않고 있다.

경제금융부 부애리 기자 aeri345@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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