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제훈기자
향후 30년간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주도해 나갈 주역으로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s·1980~1996년생)’가 주목받고 있다. 맏이 그룹은 40대 초반, 막내 그룹은 20대 후반에 접어든 이들이 대한민국 각계에서 장년·노년층에 접어든 X세대와 86세대를 대체하고 있어서다. 지난 30년 간 한국사회를 주도해 온 86세대가 유년·청년기에 걸쳐 경제적으론 고도성장기, 사회적으론 민주화 이행기를 거쳤다면, 후손세대인 M세대는 저성장기와 ‘민주화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두 세대가 겪은 경험의 차이가 적지 않다. 이에 각기 선진국 세대와 민주화 세대, 산업화 세대를 대표하는 가상인물인 김지훈(1990년생), 이영수(1961년생), 박갑수(1924년생)의 청년기 생애사를 통해 이들이 ‘살아가는’ 현재·미래를 분석해 봤다.
박갑수가 태어난 1924년은 ‘갑자년’이다. 이 시기에 출생해 청년기를 보낸 이들에게 흔히 쓰는 수식어는 ‘묻지마라 갑자생’이란 표현이다. 본래 이는 표현은 60갑자의 첫 번째인 ‘갑자(甲子)’ 해에 태어난 이들이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단 속설 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태평양전쟁·한국전쟁을 겪은 1924년생에 한해선 신체 조건만 맞으면 ‘묻지도 않고’ 강제 징용이 됐다는 의미로 사용됐다고 한다.
그런 만큼 갑자생들의 청년기를 관통하는 화두는 ‘생존’이었다. 갑수가 15세이던 1939년엔 제2차세계대전이, 17세이던 1941년엔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의 식민지 였던 조선 역시 사실상의 전시 동원체제로 전환돼 운영됐다.
이 시기 실업학교(중등교육)를 졸업, 전문학교(고등교육)로 진학한 갑수는 그 시대 최고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2009년 발간한 ‘한국교육 60년-성취와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1942년 조선의 고등교육기관(경성제국대학과 기타 전문학교) 수는 22개교, 학생 수는 4505명에 그쳤다. 이는 초등교육기관(보통학교) 숫자 대비 0.6%, 학생 수 대비로는 0.2%다.
하지만 시대의 엘리트였던 갑수도 생존투쟁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진학한 뒤인 1944년(20세)부터는 학도 특별지원군 제도가 도입돼 시행됐다. 명목상으론 지원병 제도지만 반 강제였다. 갑수는 전쟁 말기인 탓에 동남아시아나 태평양의 전장이 아닌 일본에서 복무했지만 친구 중엔 불귀의 객이 된 경우도 있었다.
1945년(21세)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왔지만 준비되지 않은 독립은 혼란을 초래했다. 2000%가 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나타나는가 하면, 장래 정부수립을 둔 좌우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갑수는 22~23세이던 1946~1947년께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을 하나 둘 씩 얻었지만 시대의 혼란은 지속됐다.
갑수가 26세던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생존 투쟁의 정점이었다. 소위 ‘인텔리’였던 갑수는 가족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목숨줄은 건졌지만 갑수역시 징집을 통해 종전(1953년, 29세)까지 복무하며 재차 사선을 건너야 했다.
이런 갑수의 생존투쟁기는 일세를 풍미한 갑자생 정치인들의 삶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갑자년에 태어난 김대중 전 대통령(호적상은 1926년)은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한 1944년 한 해운회사에 취업했다. 당초 진학을 염두에 뒀지만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취업으로 선택지를 바꾼 것이다. 해방 후 좌우 대립의 한 복판에 섰던 그는 한국전쟁 과정에서도 ‘자본가’란 이유로 인민군에 의해 처형 직전까지 내몰렸다 구사일생했다.
갑자생이자 고도성장기 경제관료인 김정렴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청년기도 마찬가지다. 논산 강경상업학교, 일본 오이타경제전문학교를 졸업한, 당시로선 엘리트였던 김 전 실장은 1944년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로 징병돼 히로시마에서 종전을 맞았다. 해방 이후론 국내에 돌아와 1949년 군에 입대해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다. 실제 김 전 실장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평생 후유증을 앓은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전쟁은 물론 파괴 이후 ‘신질서’도 만들어 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계급사회는 붕괴됐다. 군문에 들어선 갑자생들은 미국과 유엔(UN)의 군사지원이 지속되는 가운데 ‘군부 엘리트’로 성장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등 1920년대생이 주축인 육군사관학교 8기가 이후 5.16 쿠데타의 주역이 된 것도 이를 배경으로 한다.
휴전 후론 본격적인 경제재건이 시작됐다. 1954~1959년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5.3%에 달했다. 다만 이는 미국 등의 원조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 갑수가 서른 여섯이던 1960년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는 불과 79달러에 그쳤다. 최빈국이었던 셈이다. 본격적인 경제발전은 4.19혁명 이후 장면 정권이 입안하고 박정희 정권이 구체화 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된 이후부터다.
‘영수’는 1940~1960년대 인기를 끈 남성 이름이다. 대법원이 지난 2014년 사업부가 출범한 1940년대 이후 60여년간 시대별 출생신고한 이름을 분석한 결과 1940~1960년대엔 영수, 1970년대엔 ‘정훈’, 1980~1990년대엔 ‘지훈’, 2000~2010년대엔 ‘민준’이 가장 많았다.
이영수가 청소년기를 보낸 1970년대는 앞선 산업화 세대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 본격화 되는 시기였다. 중화학공업에 대한 막대한 자본투자를 바탕으로 연평균 10.5%(1970~1979년)에 이르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1973년엔 제1차 오일쇼크에도 연 14.9%(1973년)란 건국 이래 최대의 경제성장률을 나타냈다.
특히 영수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첫 해인 1977년(16세)엔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GDP 1000달러를 넘어서며 최빈국 딱지를 뗐다. 어린시절 고무신을 신고 자란 영수는 운동화를 신고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영수는 1980년(19세) 마지막 ‘대학입학 예비고사’를 보고 대입에 성공했다. 당시만 해도 영수처럼 순탄한 삶을 사는 동년배들은 많지 않았다. 교육부 등에 따르면 1980년 고등교육기관 취학률은 11.4%에 그쳤다. 영수는 대입으로 동년배 10명 중 1명에 해당하는 ‘엘리트’ 반열에 들었다.
세상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1979년, 18세)으로 해빙된 듯한 정국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계엄확대(1980년, 19세)로 다시 얼어붙었다. 중화학공업 과잉투자와 제2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경제는 역성장했다. 입학 이후론 연일 이어지는 각종 시위와 동맹 휴학, 계엄확대 등으로 수업조차 제대로 열리지 못했다.
이를 방증하듯 86세대를 지배한 것은 강렬한 민주화운동의 추억이었다. 아시아경제가 5월31일부터 6월5일까지 여론조사기관 엠브레인에 의뢰, 전국 20~6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패널조사에서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정치사회적 사건’을 꼽는 질문에 86세대(1960~1969년생)의 32.6%는 5.18광주민주화운동-6월항쟁을 꼽았다. 그 뒤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27.5%),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22.3%) 순이었다.
이듬해인 1981년(20세), 영수는 군 입대를 선택했다. 복무가 단축되긴 했지만 30개월을 군 내 부조리 속에서 보내야 했다. 1983년(22세) 말 제대 후 복학한 뒤에도 캠퍼스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일부 선후배들은 위장취업, 하방 등으로 민주화 운동에 나섰지만 영수는 그렇지는 못했다. 대신 음으로 양으로 이들을 도우며 죄책감을 달랬다.
영수는 1987년(26세) 취업에 성공했다. 경제성장 기조는 뚜렷했던 만큼 취업은 어렵지 않았다. 1980~1989년 한국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8.9%에 달했다. 서른 즈음이었던 1989년 한국은 3저 호황 등에 힘입어 GDP는 2469억2700만 달러, 1인당 GDP는 5817달러로 성장하며 ‘아시아의 네 마리 용(龍)’ 반열에 올랐다.
오지 않을 것 같은 봄도 왔다. 1987년 6월 항쟁이 시작되면서 신입사원이었던 영수도 ‘넥타이 부대’로 나섰다.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며 ‘승리’의 경험을 만끽했다. 강렬했던 기억만큼이나 영수를 위시한 86세대는 우리 사회가 가장 역동적이었던 시기로 민주화 및 3저호황(1986~1989년)기를 지목(27.0%) 했다. 이는 이전 세대(31.4%)에 이어 가장 높은 수준이다.
영수는 27~28세 무렵인 1988년을 전후로 결혼을 했고 첫 자녀를 얻는 데 성공했다. 1990년을 전후로 둘째 자녀를 얻었다. 통계청 기준 1988년의 남성의 평균 초혼연령은 27.5세였다. 이 시기를 거치며 한국의 발전수준은 일신했다. ‘20대 시절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수준’을 묻는 질문에 86세대의 58.4%는 개발도상국이라고 답했다. 현재의 수준을 묻는 질문엔 42.5%가 '선진국 직전', 16.7%가 '선진국'이라고 응답했다. 1988년의 서울올림픽은 이같은 ‘승리’를 상징하는 팡파르였다.
민주화 이후 이들은 사회 곳곳의 주류세력으로 부상했다. 1990년대 들어 보혁 양당이 인재영입을 지속하면서다. 1996년 불과 31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직에 당선된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운동권-검사 생활을 거쳐 1999년 정계에 입문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등이 이런 길을 걸어 왔다.
지훈 역시 영수처럼 1980~1990년대를 풍미한 대표 인명이다. 지훈이 청년기에 진입한 2010년대 전후로 한국은 명실상부한 ‘선진국’ 대열에 올랐다. 지훈이 고등학생이던 시절인 2006년(16세) 1인당 GDP는 2만달러를 돌파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저성장’ 기조가 본격화 된 시기이기도 하다. 지훈이 청년기에 돌입한 2010년대(2010~2019년)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3.3%로 세계 평균(3.2%)과 단 0.1%포인트의 차이만 보인다.
지훈이 2008년(18세)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국내 경제성장률을 7%로, 10년 내 1인당 GDP를 4만달러로, 국력을 세계 7위권으로 만들겠다는 이른바 ‘747’ 공약을 내걸고 출범했지만 시대착오적인 구상이었다. 저성장이 시작되면서 중·고등학교 시절엔 카드 사태(2003년), 부동산 폭등(2005~2006년), 글로벌 금융위기(2008~2009년) 등 자산시장의 성쇠가 거듭됐다.
지훈의 고등학교 시절은 경쟁의 연속이었다. 수시, 정시 전형 모두 놓칠 수 없었던 만큼 주중엔 야간자율학습과 인터넷 강의, 주말엔 학원·과외를 전전하며 녹초가 돼야만 했다. 이따금 주변의 수시 합격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허탈함도 느껴야 했다. 2009년(19세) 대학에 진학했지만 예전처럼 성공의 길이 보장된 것도 아니었다. 2010년 고등교육기관 취학학률은 69.3%에 달했다. 이는 1989년 고등학교 취학률(69.8%)과도 비슷한 수준이다.
특히 지훈이가 스무살 무렵이 된 2010년대 이후로는 경쟁이 더 치열해졌다. 지훈이 대학 진학, 군 복무, 취업 준비, 사회생활 시작 등을 겪은 지훈은 2010년(20세) 입대, 18개월의 군 복무기간(육군 기준)을 보냈다. 예전처럼 구타나 가혹행위가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복학 후 진로 고민에 마음은 복잡했다.
2012년(22세) 복학 한 뒤론 고민이 현실화 됐다. 군 면제 동기나 여동기들은 그간 꾸준한 스펙 관리로 한 발 앞서나갔다. 지훈은 남은 학기 동안 학점 관리 외에도 각종 봉사활동, 자격증 준비로 눈 코 뜰 새가 없었다. 생활비 마련을 위한 아르바이트는 덤이다.
취업에 성공한 것은 27세가 된 2017년이었다. 1인당 GDP가 3만불을 돌파한 첫 해이기도 하다. 친구들은 지훈의 ‘때이른’ 취업을 부러워했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2020년 자체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2018년 기준 대기업 신입사원 평균 입사연령은 30.9세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25.1세)보다 5.8년 늦춰진 것으로 조사됐다.
가정 꾸리기도 쉽지 않았다. 서른이 된 2020년엔 코로나19와 이에 따른 경기침체를 막기 위한 유동성 확대로 자산시장이 급격히 버블화됐다. 결혼, 출산에 앞서 주택마련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 된 것이다. 올해 33세인 지훈은 내년께서야 여자친구와 결혼식을 치르기로 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남성의 초혼연령은 33.7세에 달했다. 30여년 전(27.5세)와 8.2세의 차이가 난다.
지훈이 살아온 청년기는 정치적으로도 ‘아노미(anomie)’의 지속이었다. 직선제 쟁취, 수평적 정권교체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는 진전됐으나 산업화-민주화 세력 간 진영대립은 더욱 커졌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이를 방증 한다.
M세대가 가장 강력한 인상을 받은 정치·사회적 사건으론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46.4%)이 꼽혔다. Z세대의 경우 세월호 참사(47.1%)를 지목한 비중이 압도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투표권을 가지지 못했던 후배 세대에 비해 탄핵 사태가 가져다 준 충격이 컸음을 보여준다.
유럽 '벨에포크(좋은 시절)' 시기에 비견되는 고도 경제성장기의 끝물과 과실, 성장동력 약화와 자산불평등이란 후퇴압을 동시에 경험한 M세대의 우리 사회 인식은 복합적이다. 20대 시기 우리 사회 수준을 묻는 질문엔 가장 많은 응답자(36.5%)가 '선진국 직전'을, 차순위(32.1%)가 ‘중진국’을 지목했다. 반면 현재의 우리 사회 수준에는 중진국(32.6%)이란 답변이 가장 많았고 선진국 직전(31.7%)이 차순위였다.
대한민국의 선진국 진입이 내 삶에 구체적 영향을 준다는 응답도 35.6%(매우 그렇다 3.6%, 그렇다 32.0%)로 전 세대 중 가장 낮았다. 각종 지표가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랐음을 보여주지만 M세대 개개인이 느끼는 변화는 크지 않았을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개인의 노력으로 계층이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서 부정적으로 답한 비중(그렇지 않다 31.4%, 전혀 그렇지 않다 10.5%)이 41.9%로 가장 많았다. 특히나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한 비중도 10.5%로 전 세대(3.8~7.5%) 대비 유난히 높았다.
이렇듯 서로 다른 성장경로를 겪은 영수와 지훈의 세계관 또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직장에서 불합리한 일이 발생할 경우 취하는 태도’와 관련해 영수 등 86세대의 50.6%는 ‘당장 바꿀 수 없더라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답했지만 지훈 등 M세대는 해당 답변 비중이 43.1%로 전 세대 중 가장 낮았다. 해결방안에 대해서도 M세대는 ‘퇴사한다’는 비중이 16.4%로 전 세대 중 가장 높았다.
시점을 확대해 정치, 사회에서 불합리한 일이 발생할 경우 취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M세대는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응답이 21.6%로 전 세대 중 가장 낮은 반면, 86세대는 30.5%로 이전 세대(35.2%)에 이어 두번째로 높았다.
향후 우리사회의 발전방향에 대해서도 M세대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향후 한국정치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느냔 질문엔 50.0%가 부정적(그렇지 않다 33.5%, 전혀 그렇지 않다 16.5%)이라고 답했다. 전 세대 중 가장 높은 비중이다. 반면 86세대는 43.3%만이 부정적이라고 답변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86세대 등 50~60대는 직장 내에서도 리더 그룹에 해당하는 만큼 어떤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긍정적이고 자신감있는 태도를 보이는 반면, 허리 역할을 하는 M세대는 리더그룹과 사회 초년생인 Z세대 사이에서 샌드위치인 상황”이라면서 “저성장 시대에 돌입한 만큼 고도성장기를 겪었던 이전 세대에 비해 냉소적인 세계관을 보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