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그날엔]판사는 왜 '전두환 사형'을 선고했을까

1996년 8월26일 서울중앙지법 1심판결
군사반란, 내란 혐의로 사형 선고
“내란의 수괴로서 군 내부질서 파괴”

편집자주‘정치, 그날엔…’은 주목해야 할 장면이나 사건, 인물과 관련한 ‘기억의 재소환’을 통해 한국 정치를 되돌아보는 연재 기획 코너입니다.

“내란의 수괴로서 직분을 망각하고 군 병력을 동원해 군 내부질서를 파괴하고….”

1996년 8월2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30부(재판장 김영일)는 역사적인 사건의 판결과 관련한 양형 이유를 밝혔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씨는 군사반란과 내란, 뇌물수수 혐의로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1심 재판부는 12·12와 5·18 사건의 핵심 혐의자인 전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80년대 철권통치를 이어갔던 절대 권력의 소유자가 법정에서 단죄를 받은 순간이다. 대통령을 지낸 인물에 관한 사형 선고는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1심 재판부는 12·12와 5·18 사건을 군형법상 반란죄와 형법상 내란죄로 규정했다. 구국의 결단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군사 쿠데타로 정리했다. 광주 학살은 내란 목적의 살인으로 규정했다. 1심 재판부의 판단은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당시 재판장은 세기의 재판으로 불렸던 그날의 심경과 관련해 이렇게 전했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보는 시각들이 많지만 사법적 처리를 위해 재판부로 넘어온 이상 법적인 고려만이 있을 뿐이다. 투명한 상태에서 재판했다고 자부한다.”

대통령을 지낸 인물을 향해 사형을 선고한 법원. 부담이 없을 수 없다. 재판장의 설명은 원론적인 답변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많은 의미가 녹아 있다.

그날의 결정은 역사에 기록돼 두고두고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여론에 휩쓸려 판단을 해도, 권력의 눈치를 봐도 안 되는 세기의 판결.

김영일 재판장은 사건을 배당 받은 이후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만남을 끊고, 집안 대소사에도 참석하지 않는 등 개인의 동선 관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했다는 얘기다.

사형 선고가 내려졌던 1996년 8월26일 전씨의 부인 이순자씨는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 있었다. 아들들과 함께 백담사를 찾은 이씨는 이날 예불을 올리는 것으로 심경을 대신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부인 이순자 씨가 2020년 11월 30일 광주지법에서 열리는 사자명예훼손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나서고 있다. /김현민 기자 kimhyun81@

전씨 측에서는 사형 선고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전씨 변호인 이양우 변호사는 언론에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분명히 다른데 지금의 기준으로 그때 일을 평가하려 드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1심의 사형 선고는 2심과 대법원을 거치면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최종 형량은 축소됐지만, 쿠데타로 집권한 전직 대통령을 향해 1심 법원이 사형을 선고했었다는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1996년 8월26일이 역사적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전씨는 1979년 12월 군사반란을 통해 실권을 잡은 뒤 1988년 2월 노태우 신임 대통령에게 권좌를 물려주기 전까지 대한민국 최고 권력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권력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세상은 변했다.

전두환 정부 시절 집권 여당인 민정당은 민자당을 거쳐 신한국당으로 당명이 바뀌었다. 민정당 출신들이 여전히 집권 여당의 일원으로서 정치를 하던 1996년 김영삼 정부 시절, 전두환 사형이라는 판결이 나온 것은 눈여겨볼 부분이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은 1996년 8월26일의 결론으로 이어진 마중물이었다.

당시 로이터통신은 세기의 재판 결과를 긴급 뉴스로 타전하며 한국의 변화에 주목했다.

과거 군사 통치의 망령을 떨쳐버리려고 애쓰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이 재판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슈1팀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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