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비트]재택근무에 무너진 퇴근…'워라밸이 필요해'[오피스시프트]⑥

재택근무 여파로 불분명해진 일과 생활의 경계
세계 곳곳서 '연락 끊을 권리' 법안 속속 등장

편집자주[찐비트]는 '정현진의 비즈니스트렌드'이자 '진짜 비즈니스트렌드'의 줄임말로, 일(Work)의 변화 트렌드를 보여주는 코너입니다. 찐비트 속 코너인 '오피스시프트(Office Shift)'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시작된 사무실의 변화를 꼼꼼히 살펴보고 그동안 우리가 함께해온 실험을 통해 업무 형태의 답을 모색하기 위한 바탕을 마련하는 콘텐츠가 될 것입니다. 매주 토·일요일 오전 여러분 곁으로 찾아갑니다. 40회 연재 후에는 책으로도 읽어보실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아시아경제 정현진 기자] <i># A씨(35)는 취업 시장에서 구직자들이 가장 취업하기를 원한다는 국내 대형 IT 업체에 다닌다. 이 회사는 코로나19 기간 중 적극적으로 재택근무를 실시했다. 집에서 일하는 직원을 격려하기 위해 '의자계의 샤넬'이라는 고급 의자를 집으로 보내주기까지 했다. 그는 "재택근무도 재택근무 나름"이라며 "일이 너무 많아 집에서 잠옷 바지 차림으로 자정까지 저녁도 못 먹고 일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현타(현실 자각 타임·큰 허탈감을 느끼는 상태)'가 왔다"고 했다. 사무실에 있었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이동하는 진짜 '퇴근'이 가능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며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i>

코로나19는 전 세계 직장인의 웰빙과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Work And Life Balance)'에 대한 관심을 폭발시켰다. 건강한 근무 환경을 원하는 직장인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주목받은 것이 바로 근무 시간이었다. 오래 일하면 생산성이 높아지는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전에 조금씩 논의됐던 이 이슈는 코로나19를 계기로 워라밸이라는 트렌드와 만나 수면 위로 올라왔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하는 일명 '나인투식스'라는 고정된 근무 시간 개념도 유연해져야 한다는 인식이 차츰 생겨났다.

◆ "퇴근 후 연락하지 마세요" 케냐에서 법제화

'퇴근 후, 주말에 연락하는 회사 사람들 어떻게 하나요?' 지난해 익명 기반의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글이 올라왔다. 회사생활을 다루는 게시판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주제다. 같은 고민을 공유하는 직장인들은 '아예 연락받지 말라', '핸드폰을 2개 만들어 하나는 출근할 때만 켜라'는 조언을 내놨다. 전화가 와도 대응하지 말라는 댓글이 주를 이뤘으나 '피해를 볼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경고도 덧붙었다.

재택근무는 이러한 근무 시간 논의를 촉발했다. 집에서 일과 생활이 동시에 이뤄지면서 출·퇴근 개념이 모호해졌다. 퇴근 이후 이메일이나 전화, 문자를 받는 일도 늘었다. 자연스레 근무 시간이 길어지며 저녁이나 주말에도 일하는 상황이 종종 벌어졌다. 일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장시간 근무한 직장인들은 신체·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사이버 보안 부문 글로벌 기업 노드VPN 팀즈가 2021년 2월 발표한 바에 따르면 영국, 미국, 오스트리아, 캐나다 등에서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재택근무로 인해 평균 하루에 2시간 이상 업무 시간이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퇴근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퇴근 후 업무가 이어지자 직장인들은 피곤함을 호소했고, 세계 곳곳에서 연락을 막는 법안이 속속 등장했다.

지난해 11월 아프리카 케냐에서 '디지털 시대에 단절할 권리를 제공하라'는 내용의 법안이 발의됐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이 법안을 발의한 삼손 키프로티치 셰라르게이 국회의원은 팬데믹 기간 중 재택근무가 확산하면서 주 최대 근무 시간인 52시간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는 이 법안에 퇴근 후, 주말 중 회사가 근로자에 연락을 취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는 "가상 사무실 시대에 번아웃을 피하고 가족과의 시간을 보장하며 정신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법을 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근무 시간 이외에 연락을 금지하는 법은 코로나19 시기 이전에도 나왔다. WP는 2016년 법을 만들어 2017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프랑스에서는 근무 시간 외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 일상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이탈리아, 스페인, 벨기에, 아일랜드, 포르투갈도 같은 내용의 법을 통과시켰다. 벨기에와 아일랜드, 포르투갈은 코로나19 시작 이후 이 법을 만들었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9월 국회에서 근로 시간 외에 카카오톡 등 통신 수단을 이용한 업무 지시를 금지하는 '근로기준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발의됐다. 팬데믹을 계기로 '연결되지 않을 권리'에 대한 필요성이 한층 커졌다.

◆ 재택근무가 오히려 워라밸을 망친다?

업무가 생활 중에 끊이지 않고 이어지면서 재택근무하는 직장인이 사무실이나 현장으로 출근하는 직장인에 비해 팬데믹 전후로 번아웃을 느끼는 경우는 크게 늘었다.

글로벌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코로나19 발생 전후인 2019년 9월과 2020년 4~9월 설문조사에서 '직장에서 번아웃을 자주 또는 항상 느끼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답변이 현장 근로자는 30%에서 26%로 줄어든 반면 완전 재택근무(100% 집에서 근무하는 형태) 직장인은 18%에서 29%로 오히려 늘었다. 갤럽은 팬데믹 이전에는 재택근무가 유연성과 자율성을 갖춘 근무 환경으로서의 매력이 있었으나 코로나19 이후에는 강제로 집에서 일해야 했고 일과 생활의 균형을 유지하기가 어려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국내에서도 구직자 다수가 워라밸을 중시하는 기조가 유지되고 있다. 2020년 8월 플랫폼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구직자 127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 39.1%가 '코로나19 이후 직장에 대한 기존 신념과 가치관이 달라졌다'고 답했다. 이 답변을 한 응답자 중 69.2%는 '금전적 보상보다 내 건강, 워라밸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답했다. 이후 지난해 10월 중소기업중앙회가 공개한 MZ세대(1980~2000년대생) 중소기업 구직자의 최대 관심사는 '근무 시간(25.8%)'으로 나타났다.

존 메신저 국제노동기구(ILO) 근무 시간 담당 전문위원은 지난달 근무 시간과 워라밸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소위 '대퇴직(Great Resignation)'으로 불리는 현상이 포스트 팬데믹 시기에 워라밸을 사회·노동 시장의 제일 앞에 두게 했다"면서 "이 보고서는 코로나19 위기의 교훈을 (근무 현장에) 일부 적용하고 근무 시간의 구조화 방식 등을 신중하게 살펴보면 서로 '윈윈' 할 수 있고 업무 성과와 워라밸을 동시에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근무 시간을 유연하게" 논의도…협업·외로움은 문제

단순히 근무 시간을 줄이는 문제를 떠나 시간을 얼마나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도 불이 붙었다. 사무실뿐 아니라 집에서도 근무할 수 있게끔 해 근무 공간의 유연화가 이뤄진 만큼 코로나19 이전부터 도입됐던 유연근무제에 대한 관심이 한층 커졌다.

근무 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다면 은행 업무처럼 주중 낮에 해결해야 하는 일을 이전보다 쉽게 해결할 수 있고, 아이나 노인 등 가족을 돌봐야 하는 직원들도 시간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 직원 개인마다 업무 집중이 잘 되는 시간이 다르고 개인 사정이 다른 만큼 큰 틀만 만들어 두되 업무 상황과 직원 개인 등 필요 요소에 맞춰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게끔 하면 되기 때문이다.

업무용 메신저 업체 슬랙의 연구 컨소시엄 퓨처 포럼이 2022년 11~12월 미국, 호주, 프랑스, 독일, 일본, 영국 등 5개국의 지식근로자 1만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근무 시간의 유연성이 있는 직장인이 그렇지 않은 직장인에 비해 생산성은 39% 향상되고, 집중력도 64% 올라간다고 답했다. 동시에 유연하게 일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직장인은 이를 맘 편히 조절하는 동료에 비해 업무 관련 스트레스와 불안 정도가 4.6배, 워라밸이 2.6배 악화한다고 느낀다고 보고했다.

다만 직원마다 근무 시간의 차이가 크면 인력 관리가 어렵고 협업에 차질이 생긴다. 카카오가 2022년 '메타버스 근무제'를 내놓으며 오후 1~5시를 코어타임(집중근무)으로 지정해 이 시간만큼은 반드시 일하도록 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또 함께 일하는 시간이 부족해 직원 개인이 고립돼 외로움을 느끼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국제2팀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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