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손바닥에 '왕(王)'…정치인, 무속·풍수 그 끊을 수 없는 역사 [한승곤의 정치수첩]

"오방색 타령…최순실과 뭐가 다른가" 여야 비판
'王자' 윤석열에 이재명 "안 보이는 데 새기지"
YS 등 역대 대통령들의 무속신앙, 풍수지리
"신선이 내려오는 터" 이장 후 대선 당선 DJ

지난 1일 MBN 토론회에 출연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 손바닥에 한자로 '왕'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사진=MBN 유튜브 채널 캡처

[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2일 손바닥에 '임금 왕'(王) 자가 쓰인 모습이 TV 방송토론회에서 포착되며 윤 캠프에 무속인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윤 전 총장 측은 "지지자들이 응원차 적어준 것"이라며 문제없다는 입장이지만, 여당은 물론 야당에서도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때아닌 정치권 무속신앙 논란으로 과거 중요한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이 무속인을 의견을 듣거나, 자신의 선거 캠프 장소에 풍수지리를 고려하는 등 현실정치 외적인 부분에도 집중한 사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군사정권하에서 무속인들은 '사기꾼'으로 몰려 시골로 쫓겨갔으나, 요즘은 분위기가 바뀌어 한국인들은 무속신앙을 한국 문화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 2007년 7월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

14년 전 한국의 정치인들이 무속신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내용의 외신 보도다. 뉴욕타임스는 이어 "올해와 같은 선거철에는 기독교 신자든 불교 신자든 무속인과 점집을 찾는 정치인들이 끊이지 않는다"면서 "유명한 무속인은 예약객들로 꽉 차서 만나기조차 힘들며, 정치인들은 무당에게 조상들의 묘를 명당으로 옮기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물어본다"고 전했다.

특히 한 종교인단체의 통계를 인용해 "서울과 인근도시에만 무속 사당 300여개가 있으며 한국 전체의 무속인 수는 30여만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보도 내용처럼 당시 정치인들은 현실 정치를 대응하는 것은 물론 무속신앙과 풍수지리 등 일종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도 상당 부분 노력을 기울였다.

미신(迷信)의 사전적 의미는 '과학적 근거도 없는 것을 맹신하는 일', '주술적(呪術的) 요소가 강하고 합리적이지 못하다' 라는 의미다. 그러나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역대 대통령들도 무속인의 의견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심지어 일부에서는 상대 정치인의 기운을 막고자 철심을 동원하는 등 기꺼이 무속신앙을 활용했다.

1993년 2월24일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후 식장을 떠나기 앞서 참관인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김영삼 대통령. 연합뉴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0년 여의도로 당사를 옮기면서 종로 관훈동 구 당사에 자기 사진을 남겼다고 알려졌다. 기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무속인 의견이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가 하면 1999년엔 충남 예산의 이회창 전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총재 조상 묘에서 누군가 박은 철심 7개가 발견되기도 했다.

속칭 '철심 박기'는 풍수지리학·민속학에서 조상 묘소에 쇠말뚝을 박으면 자손에게 해가 미친다고 풀이한다. 사람의 혈관처럼 땅에도 기(氣)가 흐르는 '지혈'(地穴)이 있는데, 이곳에 쇠말뚝을 박으면 자손들에게 가야 할 여러 좋은 기운이 끊긴다는 믿음이다.

산세·지세·수세 등을 판단하여 이것을 인간의 길흉화복에 연결시키는 설, 이를 뜻하는 풍수지리 역시 정치인들 사이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선친의 묘를 옮긴 뒤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해 주목받기도 했다. 앞서 김 전 대통령은 제7대(1971년), 제13대(1987년), 제14대(1992년) 대선에서 실패한 후 네 번째 도전 전 1995년 부모 묘소를 이장했다.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 있는 아버지 묘와 경기도 포천 천주교공원묘지에 있던 어머니 묘를 경기도 용인시 묘봉리산에 합장했다. 선친 묘 합장 자리는 유명한 지관으로 알려진 故 육관 손석우씨가 정했다.

손 씨는 당시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곳을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오는 천선하강형(天仙下降形) 명당"이라고 소개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의 대선 당선 후 한동안 정치권에는 풍수 바람이 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7년 관훈동 민정당 당사에서 대선을 치렀다. 이 장소는 1981년 신군부가 민정당을 창당하면서 사들인 곳으로 전두환 씨가 풍수지리가들을 대거 동원해 물색한 터다. 민정당사가 있던 곳은 권력이나 관운을 상징하는 '닭 볏 터'라 해서 최고의 명당으로 불렸다. 이곳에서 노 전 대통령은 이른바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을 눌렀다.

1987년 6월 전두환 대통령이 힐튼호텔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후보를 축하해 주는 모습. [이미지출처=연합뉴스]

물론 '종로구 관훈동 민정당 당사'의 풍수지리가 노 전 대통령 당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면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야권은 '양김'(김영삼·김대중)의 단일화 실패로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의 연장을 막아내지 못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닭 볏 터'가 영향을 끼친 것 아니냐는 얘기가 정치권에서 돌았다. 현실 정치뿐만 아니라 무속신앙, 풍수 등 신경을 써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정서는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래서일까, 윤 전 총장을 둘러싼 '임금 왕'(王) 논란은 해프닝을 넘어 여야 공방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 정치사에 무속신앙 등이 얼마나 깊게 자리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윤 전 총장 캠프 측은 이 같은 논란에 대해 "열성 지지자들이 윤 전 총장이 외출할 때마다 응원하며 지지 차원에서 써준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국민의힘 대권 경쟁 주자들부터 여당 등까지 비난이 이어졌다.

같은 당 홍준표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가기 싫은 곳을 가거나 말빨이 안될 때 왼쪽 손바닥에 왕자를 새기고 가면 극복이 된다는 무속 신앙이 있다고 한다. 무슨 대선이 주술 대선으로 가고 있나"라고 비난했다. 이어 "김종인 위원장을 만날 때 무속인을 데리고 갔다는 보도도 있었는데, 일일 1 망언으로 정치의 격을 떨어트리더니 다음 토론 때는 부적을 차고 나오시겠는가.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유승민 전 의원도 윤 전 총장을 향해 "과거 오방색 타령하던 최순실 같은 사람과 윤 후보님이 무엇이 다르냐"면서 "윤 후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손바닥에 '왕'을 쓰고 나왔는지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 국민에게 공개되는 TV 토론회에서 그런 모습을 연이어 보인 것이냐"라며 "정권교체가 절실한 이 때에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이 도대체 누구의 말을 듣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지 국민들은 반드시 알아야한다"고 거듭 비판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서도 비판이 이어졌다. 송영길 대표는 전날(3일) 오후 부산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BPEX)에서 열린 부산·울산·경남 지역 순회경선에서 "이러다가 최순실 시대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국민을 위해 가장 봉사해야 할 1번 일꾼인 대통령을 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순회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이재명 경기지사도 취재진 질문에 "'왕'자를 보니 갑자기 최순실 생각이 나서 웃었다"면서 "웃어넘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답답해서 그랬겠지만, 안 보이는 데 새기지 그랬다 싶다"고 꼬집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냐고 했더니, 윤석열 후보가 가리는 부적으로 '왕'자를 적어 나온 것 같다. 참으로 가관"이라고 말했다.

한승곤 기자 hsg@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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