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의 한국유사] 인조의 '공주 파천'…이괄의 亂이 발전시킨 조총 기술

인조반정 공신 이괄 父子
반란 누명받자 군사 일으켜

임진왜란 전후 항복한 왜군
조총 사용과 근접전에 뛰어나
반란군 선봉에 배치 한양 점령
백성들로부터 환영 받아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교수

조선 전체를 뒤흔든 임진왜란(1592~1597)이 끝나고 10여년이 흐른 1608년 선조가 사망하자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 군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귀와 김류가 주축이 된 서인(西人) 세력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어 인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이것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

1623년 이괄(李适)은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을 인정받아 2등 공신이 됐다. 그는 곧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임명됐다. 이후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이자 평안병사(平安兵使)로 평안도 영변에 주둔했다. 그런데 1624년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이 반란을 도모했다는 고변이 있었다. 무고임이 밝혀졌지만 조정은 이전의 모반 사실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금부도사(禁府都事)와 선전관(宣傳官)을 영변으로 파견했다. 이괄은 본인도 무사할 수 없다고 여겨 이들의 목을 베고 반란까지 일으켰다.

1624년 1월22일 이괄은 한명련(韓明璉)·이수백(李守白)·기익헌(奇益獻) 등과 함께 남하를 시작했다. 반군은 평안도 순천-자산-중화, 황해도 수안-황주-평산을 거쳐 빠르게 남하했다. 도중에 관군과의 전투도 있었으나 승리해 경기도 개성-벽제까지 이르렀다. 인조는 충청도 공주로 피란 가고 2월9일 이괄의 반군이 한양을 점령했다.

이괄은 선조의 열 번째 아들인 흥안군(興安君) 이제를 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2월11일 한양 서북의 안현(鞍峴)에서 벌어진 전투를 기점으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됐다. 도원수 장만은 군사를 수습하고 안현 점령 후 이괄의 반군과 벌인 결전에서 승리했다. 이괄은 소수의 병력을 거느리고 경기도 이천으로 달아났다. 결국 이괄의 부하 이수백·기익헌이 이괄·한명련의 목을 베고 관군에 투항하면서 난은 평정됐다.

조선 역사상 반란에 의해왕이 도성 떠난 유일한 사건

인조는 환도해 반란 평정에 공이 있는 인물들을 포상하고 민심도 수습했다. 이괄의 난이 미친 영향은 상당히 컸다. 반란군이 수도를 점령한 것은 조선 시대에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반군과 관군 모두 서북 지역을 담당하던 군사였다. 그렇기에 반란 이후 서북 지역의 군사력은 급격히 약화했다. 반란 실패 후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 등이 후금(後金)으로 달아나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려주기도 했다.

이괄은 조선 후기 내내 역적의 대명사로 인식됐다. 하지만 그가 반란을 일으킨 원인은 기찰(譏察) 정치에 있었고 이괄의 반군이 도성에 입성할 때 백성으로부터 환영받은 점은 고려할 필요가 있다. 반란이 일어났는데도 도성에서 모병(募兵)은 이뤄지지 않았다. 인조의 공주 피란길에 따르는 백성이 거의 없었다. 당시 이괄이 도성에 입성하자 많은 자가 이괄에게 귀부하려 했다. 백성이 이괄의 난을 인조반정 때와 비슷한 상황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괄이 도성을 점령할 수 있던 것은 서북 지역에 주둔하던 반군의 군사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괄의 군사는 1만2000명이 넘었다. 평안도의 병력과 전라도에서 올라온 부방군(赴防軍) 1만2000명 그리고 항왜(降倭) 130여명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 항왜란 임진왜란을 전후해 항복한 왜군이다. 북방으로 부방(赴防·조선 시대 다른 지방의 병사가 서북 변경의 국경 지대에 파견돼 방위 임무를 맡은 일)하러 왔던 항왜 130여명이 이괄의 난에 적극 가담했던 것이다.

이괄은 반란 당시 조총 사용과 근접전에 능한 항왜들을 선봉으로 배치했다. ‘선조실록’에는 "항왜 13명이 명군을 거느리고 달자(몽골)로 들어가 300여명을 죽이는 대신 항왜는 불과 3명이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우복선생집(遇伏先生集)’에는 "역적 이괄이 항왜 약간 명을 전열(前列)에 배치했는데 관군이 당해낼 수 없었다"고 돼 있다.

1624년 3월14일 인조는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완풍군 이서(李曙), 훈련대장 신경진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괄의 난 이후 군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이원익이 아뢰었다. "변란을 겪고 나서 군기(軍器)가 아주 없으니 이 점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신경진이 아뢰었다. "시골 백성이 조총(鳥銃)을 훔친 것이 매우 많다고 하니, 쌀을 주고 사들이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이원익이 아뢰었다. "병기를 구하여 바치는 자에게 일일이 상을 주면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까지 거친 조선의 군비(軍備)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4월24일에는 비변사에서 건의가 올라왔다. "이번에 일본으로 회답사(回答使·통신사)가 가는 편에 호조(戶曹)로 하여금 화사주(花絲紬) 수천 필을 장만해 보내어 조총 수천 자루를 사오게 해 경기 군사에게 나눠주어 교련해 성취하게 하소서." 4월25일에는 경연(經筵)에 참여한 이서가 아뢰었다. "도감(都監)의 군기(軍器)는 변란을 겪은 뒤에 아주 없는데, 근래 저자에서 산 것은 겨우 조총 200여자루뿐입니다."

5월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서는 인조에게 군병이 있으면 병기가 있어야 하는데 군기시(軍器寺)와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군기(軍器)가 형편없다고 걱정을 토로했다. 또 조총 2000자루와 활 3000자루로 경기 군사 5000명을 무장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당시 피폐해진 조선의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란에 전복될 뻔한 인조조총 대량 생산·보급에 집착포수 비중 절반가량 늘어

인조는 조총에 집착했다. 인조의 적극적인 의지로 포수(砲手) 비중이 늘었다. 1649년 당시 수도 외곽 방어를 담당하던 총융청(摠戎廳)의 경우 포수가 5400여명에 달했다. 조총이 없는 병사에게는 훈련도감에서 조총 800자루를 지급하고 총융청에서는 300자루를 추가로 제조했다. 인조 재위 말기 지방군의 경우 포수 비중이 40% 이상까지 높아졌다. 20여년 만에 조선군의 병종 구성이 급변한 것이다.

특히 동북 변경인 함경도는 포수 비중이 절반을 넘었다. 1648년 함경 감영에서 거느린 병사 8000명 가운데 4000명이 포수였다. 중앙과 달리 제반 여건이 열악하던 함경도는 어떻게 조총을 제작해 조달했을까.

당시 함경도의 조총 제조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박취문(朴就文)이 작성한 일기다. ‘부북일기(赴北日記)’는 박계숙(朴繼叔)·박취문의 일기다. 부자가 약 40년의 시차로 각각 변방에 1년간 부방하러 갔을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부자 모두 함경도 회령(會寧)에서 부방하고 돌아왔다.

1645년 10월 박취문은 공방(工房)에 차정돼 임무를 부여받았다. 조총 400자루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1645년 10월29일부터 1646년 1월24일까지 총 88일간이었다. 본격적으로 조총 제작에 나선 것은 타조(打造)가 시작된 11월3일이었다. 따라서 실제 조총 제작에 소요된 시간은 83일이었다. 이 기간에 제조된 총은 완성품 187자루, 미완성품 98자루, 사냥총 3자루였다. 미완성품까지 포함할 경우 총 288자루가 제조됐다.

회령 공방의 제조 속도는 하루 3자루 남짓이었다. 당시 중앙의 훈련도감에서는 하루 11자루 남짓을 생산했다. 중앙에 비해 함경도의 생산 속도가 낮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총 제조에 동원된 장인의 숫자와 숙련도, 대장간과 화로의 수 등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함경도 회령에서 80여일 만에 300자루에 가까운 조총을 생산해낸 것이다.

인조대 조총 생산은 그 품질을 떠나 대단한 생산량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은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 인조반정(1623), 이괄의 난(1624),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을 겪었다. 연이은 전란 이후 조선은 효과가 뛰어난 조총 생산과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다. 군사의 일은 전란을 겪기 전 미리 갖추고 대비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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