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잊혀진 로켓의 아버지

1926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어번에서 로켓실험 중인 로버트 고다드의 모습. [이미지출처=미 항공우주국(NASA) 홈페이지/www.nasa.gov]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런던 밤하늘에 투하된 나치 독일의 V2 로켓을 보고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과학고문들을 불러 불같이 화를 냈다. 앞서 영국 정부의 과학고문들이 V2의 로켓엔진을 비과학적 사기극이라 치부한 탓이다. 그들은 산소가 희박한 높은 고도에서는 연료를 연소시켜 비행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문제는 그 사기극이라던 로켓에 런던에서만 9000명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나치 독일이 대서양을 건널 로켓도 만든다고 으름장을 놓자 미국도 공포심에 휩싸였다. 미국 과학계에서도 로켓엔진은 과학적으로 개발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던 터라 V2의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독일 패망 이후 미국에 투항한 V2의 개발자,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는 "나의 로켓은 미국인, 고다드의 로켓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말해 미국인들을 더 큰 충격에 빠지게 했다.

미국 과학계는 뒤집혔고, 언론에선 고다드란 인물을 찾아내기 바빴다. 하지만 주인공 로버트 고다드는 1945년 2차 대전 종전을 며칠 앞두고 숨진 뒤였다. 생전 고다드는 매사추세츠 시골농장 출신의 이름 없는 연구원이었을 뿐이다. 그는 1920년 조만간 달에 사람이 갈 수 있다는 로켓공학 논문을 쓴 이후 과학계에서 완전히 매장당했다. 뉴욕타임스는 그의 논문을 두고 "고등학교조차 나오지 않은 사람이 쓴 논문"이라 혹평했다.

실제 2차 대전 전후로 고다드는 미군에 탄도미사일로 개량할 수 있는 로켓 설계도면을 계속 보냈다. 하지만 미군은 그 자료들이 현실성이 없다며 폐기해버렸고, 나치 독일은 역으로 이 자료를 입수해 V2 로켓의 액체연료 엔진을 만들었다. 정작 우주개발의 모든 영광은 고다드의 로켓엔진을 베낀, 적국의 과학자 브라운 박사에게 돌아갔다. 미국으로 투항한 뒤 그는 미 항공우주국(NASA)을 창설했고, 아폴로11호를 달에 보낸 미국의 영웅이 됐다.

두 인물에 대한 대접이 이토록 달라진 이유는 출신성분 때문이었다. 브라운 박사는 독일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에 어머니는 영국 왕실 사람이었다. 유럽 최고 공대인 스위스 취리히 공과대학을 나온 귀티 나는 그의 모습에 나치 독일의 수괴란 과거는 곧바로 잊어버렸고, 그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간판 스타가 됐다. 이에 비해 고다드는 선천성 천식을 앓고 성격이 내성적으로 친구도 별로 없던 터였다. 로켓 관련 특허만 200개 이상 냈지만, 어느 누구도 인정해주질 않았다. 미국 과학계에서 그는 그저 달나라에 간다는 허풍쟁이에, 로켓에 미친 과학자로 치부됐다.

그나마 고다드가 생전에 잃었던 명예를 되찾은 건 아폴로11호 덕이었다. 뉴욕타임스는 아폴로11호의 달착륙 하루 전 과거 고다드에 관해 맹비난했던 기사를 철회하며 그를 '로켓의 아버지'라 치켜세워줬다. 오늘날에는 미국 정부와 과학계가 생전에 그의 능력을 좀 더 빨리 인정해줬더라면, 독일인의 손을 빌려 달에 갈 일은 없었을 것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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