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윤기자
[아시아경제 이정윤 기자] "저 대학 때만 해도 책 도둑 꽤 많았죠. 물론 범죄라는 건 알았지만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다'라는 말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어요."
1970년대 후반 대학을 다닌 김정익(64ㆍ76학번)씨의 회고다. 경제적 사정 때문에 책 도둑이 됐다는 경험담은 주변에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 주변 책방이나 심지어 다른 학우의 사물함 속 책을 훔쳐 공부한 경우도 흔했다. 김씨는 "당시에는 생계형 도둑 중 특히 책 도둑을 좀 특별히 바라봐줬던 거 같다"며 "경찰에 잡혀도 잘못을 뉘우치면서 책을 돌려주면 훈방 조치를 해줬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책 도둑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주는 분위기는 비단 40년 넘은 '옛날옛적 이야기'만은 아니다. 10여년 전인 2008년 광주에서 붙잡힌 책 도둑 김모(당시 27세)씨 사례. 9만원어치 취업 서적을 훔친 취업재수생 김씨는 '시골 부모님께 차마 더 손을 벌리기 어려워서'라고 말했다. 경찰은 실정법과 인정 사이에서 고민하다 '정상참작'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김씨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경제적 사정과 법 인식이 달라지며 이제는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다'라는 말 자체가 드물게 들리는 시대다. 하지만 사실 책 도둑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많다. 훔치는 대상이 책에서 동영상으로 달라졌을 뿐이다.
공무원시험 준비생(공시족)이 주로 활용하는 '인강(인터넷 강의) 도둑'의 대표적인 형태는 '함께 모여 보기'다. '인터넷 강의 스터디'라고 부르며, 강의 비용을 갹출해 비용을 마련한 뒤 빈 강의실이나 스터디룸에 모여 강의를 함께 듣는 방식이다. '둠강'이란 것도 있다. '어둠의 강의'라는 뜻의 이 신조어는 인터넷 강의를 아예 녹화해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공무원 임용시험 정보를 공유하는 온라인 카페에서나 지인 간에 알음알음 거래가 이뤄진다. 구매자와 판매자가 약속 장소에서 만나 강의가 담긴 웹하드의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넨다. 둠강은 정식 인터넷 강의 비용의 15~20% 수준으로 저렴하다.
물론 책 도둑이나 인강 도둑 모두 시대와 상관없이 불법이다. 달라진 점은 과거에는 그나마 '인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걸리면 즉각 처벌' 대상이 된다는 정도다. 현행 저작권법은 저작물에 대한 재산권을 복제ㆍ배포ㆍ대여ㆍ공중 송신 등 방법으로 침해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공부하고 싶어 어쩔 수 없었어요'라는 울먹임이 처벌을 면해주지 못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공시족들의 줄타기는 위험해 보인다. 행정고시의 경우 관련 인터넷 강의를 전부 보는 데 500만원이 넘게 든다고 한다. 한 강좌만 따로 보는 경우에도 최소 15만원가량 필요하다. 취업 포털 인크루트가 지난해 10월 내놓은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공시족의 월평균 지출은 116만7000원 수준이다. 인터넷 강의 1, 2개만 들어도 전체 생활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해진다.
올해 마지막으로 공무원 임용시험에 도전한다는 황모(28)씨. "불법 공유를 하지 않는 사람은 금수저이거나 이쪽 판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 겁니다. 아르바이트도 겸하면서 공부하고 있지만, 둠강에 의존하는 건 솔직히 어쩔 수 없어요." 행정고시 준비생 이영도(25ㆍ가명)씨는 "수험 생활이 3년 넘게 이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인터넷 강의 스터디에 참여하고 있다"며 씁쓸해했다.
이정윤 기자 leejuyoo@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