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산골 애인에게/허연

망했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떠올랐다당신,그렇게 등 돌리고 가서는어떻게 그 눈 많은 날들을 이겨 냈는지세찬 물소리가 혼을 빼 가던강변 민박집에서 눈을 감으면누군가 떠나가는 소리들이 들리곤 했다이른 새벽 구절리로 가는 젊은 영혼이거나아니면 영월로 야반도주 짐 꾸린 산판 인부이거나그게 벌써 언제지……막걸리 잔에 맺힌 이슬이 아래로미끄러지는 걸 보며 나는 자꾸만궂은 생각에 체머리를 흔들었다차부에서 십 리는 걸어야 했다던그 고향 집 큰언니는 너를 안아 주었는지여기서 멀지 않았지칠 벗겨진 이순신 장군 동상 서 있는2층짜리 교사가 있었고별이 막 달려든다고운동장에서 외쳤었지가뭄 끝은 있어도 홍수 끝은 없다고우리가 나무배에 잠시 태웠던 것들은 이제어디로 쓸려 갔는지 알 수 없고자꾸 눈을 감는 내게훅하고 집어등 불빛 같은 게 지나갔다눈발은 두렵게 날리고체인 걱정을 잠시 하다가막걸리 잔을 다시 든다춥게 살았던 날들춥게 살았던 내 산골 애인에게차갑게 식은 파전을 집어먹으며오늘 말한다그날이 진경이었음을
■시인은 지난겨울 산골에 갔었나 보다. 산골의 어느 허름한 식당에서 파전에다 막걸리를 마셨었나 보다. 그 이전부터 눈이 내렸던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눈은 자꾸 더해 내렸었나 보다. 그러다 옛 생각이 났나 보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 "칠 벗겨진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는" "2층짜리 교사"가 있던 학교 "운동장에서" "별이 막 달려든다고" 외치던 "당신"이 떠올랐나 보다. 시인이 그랬듯 "당신" 또한 "어떻게 그 눈 많은 날들을 이겨 냈는지" 묻고 싶었나 보다. "두렵게 날리"는 눈 속에서 "오늘"에야 누구나 "애인"이지 않았느냐고 지나온 어느 날이든 "진경"이지 않았느냐고 자꾸자꾸 속다짐을 하고 했었나 보다. 채상우 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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