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현기자
용금옥의 추탕
◆남원식, 원주식과 다른 서울식 '추탕'=추어탕이라고 소개됐지만 용금옥에서 정식 메뉴 이름은 '추탕'이다. 이는 예로부터 서울식 추어탕을 이르는 말이었다. 미꾸라지를 갈고 된장을 쓰는 남원식이나 미꾸라지를 통째 넣고 고추장으로 맛을 낸 원주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배추와 간 추어를 넉넉하게 넣고 된장을 풀어 끓인 경상도식과도 다르다. 서울 사람조차 낯선 서울식 추탕은 소고기로 육수를 내 얼큰하게 고춧가루 양념을 하고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어 끓이면서 유부, 두부, 버섯 등도 함께 넣어 맛을 더한 음식이다. 추어탕은 1950년대만 해도 이 같은 서울식이 주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술로 명성을 떨쳤던 시인 수주 변영로는 '명정 40년'에 이렇게 썼다. "유명한 해정(解酊) 주점이 화동에 있었는데 일컫기를 황보 추탕집이라 하였다. 그 당시 황보 추탕이라 하면 간이주점의 별칭이고 해정 술집의 대용어나 상징어가 될 만한 정도의 명물 집이었다. 우리는 거시내시(去時來時) 심심하면 들러서 해정보다는 차라리 해갈을 한 바…" 그러면서 변영로는 이 황보 추탕집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상되는 인물이 한글학자이며 역사학자였던 애류 권덕규라고 소개했다. 그 시절 수주와 애류는 해장을 위해 추탕을 먹으로 갔다가 또 그 국물에 술을 마시고 그랬던 모양이다. 수주와 애류가 해장을 위해 찾았다 해갈을 했던 그 추탕집은 당시 경기중학교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화동에 있던 경기중학교 건물은 지금의 정독도서관이다. 정독도서관 인근에서 그 황보 추탕집은 이미 찾을 수 없다. 이 집과 더불어 1930년대 서울에는 명성 높은 추탕집이 세 곳 더 있었는데 형제추탕과 곰보추탕 그리고 바로 용금옥이다. 우선 형제추탕은 1920년대 말 선산 김씨 다섯 형제들이 동대문 밖 신설동 경마장 옆에 문을 연 집이었다. 1960년대 중반 문을 닫았다가 형제 중 막내가 사라져가는 추탕을 계승하기 위해 1980년대 말 문을 다시 열었고 지금은 평창동으로 이전해 형제추어탕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곰보추탕은 형제추탕에서 일하던 정부봉씨가 1930년대 초 독립해서 낸 가게인데 처음에는 간판 없이 추탕을 팔았다. 주인의 얼굴 때문에 손님들이 '곰보추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집은 안암교 근처에서 80년 넘게 자리를 지켰지만 가게를 물려받을 사람이 없어 최근 문을 닫았다.용금옥은 1932년 개업해 지금도 서울 한복판에서 성업 중이다. 올해로 85년의 역사다. 이 세월 동안 서울식 추탕만을 고집하고 있다. 황보 추탕집에서 해장을 하다 해갈을 하던 변영로도 용금옥의 단골이었다고 한다. 요리사 박찬일은 노포 기행을 엮은 '백년식당'이라는 책에서 이 집에 대해 이렇게 썼다. "현대사의 고단한 역사를 그대로 안고 있는 집이다. 이곳이 식당은 밥 먹는 집이라는 전통적 통념과 달리 현대사에서 늘 거론되는 건 이유가 있다. 해방 전부터 민족 지사와 문사, 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고, 해방 후에는 야당 정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북 회담에서 북측 인사가 이 식당의 안부를 물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소개돼 있다. "그곳의 맛은 여전합니까?"라고 물었을까. 아마도 북한에서는 이 서울식 추탕의 맛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맛은 어떨까. 용금옥의 추탕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고춧가루 양념을 한 빨간 국물에 뜬 유부였다. 추어탕에 유부라니 다소 생경했지만 휘 저어보니 통째 든 추어가 떠올랐다. 10㎝는 돼 보이는 크기의 추어가 꽤 여러 마리 들어 존재를 뽐냈다. 넉넉하게 준비된 파를 넣고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으니 육개장과 비슷한 대중적인 맛이 들어왔다. 유부는 국물과 잘 어울리고 두부, 버섯 등 여느 추어탕에는 들어가지 않는 건더기들도 한 그릇의 추탕 맛을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었다. 추어의 살은 국물을 머금고 있지만 담백하고 뼈는 고소하게 씹혔다. 추탕 한 그릇에 고단한 역사도 담겼지만 다양한 맛도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소고기 육수의 시원함과 미꾸라지의 고소함, 얼큰한 국물을 머금은 국수, 제피가루의 매콤하고 톡 쏘는 향까지. 수주가 소개한 것처럼 서울식 추탕은 술을 부르는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