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전 산자부 장관-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촛불혁명 이후 길을 찾다
'춧불'의 열기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병신년이 가고 정유년을 맞았다. 거대한 촛불의 물결이 보여준 시민혁명의 에너지는 과연 지난해 말의 대통령 탄핵을 넘어서 새해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변화, 체제의 변화,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낼 것인가. 올해 대한민국 앞에 놓인 중차대한 과제다. 특히 올해는 87년 6월 항쟁 30주년. 촛불 혁명의 과제가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한국사회의 총체적인 변화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고민하고 모색해 온 김영호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좌교수(전 산업자원부 장관)와 곽노현 징검다리교육공동체 이사장(전 서울시 교육감)이 만나 '촛불 혁명'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대담은 지난해 12월27일 아시아경제 회의실에서 열렸으며 그 후 서면과 전화 인터뷰에 의한 보완이 이뤄졌다.
'촛불'로 발현된 시민민주주의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 김영호 교수(가운데)와 곽노현 이사장(왼쪽)이 대담을 나누고 있다.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가셨을 때 어떤 것을 느끼셨습니까?▲ 김영호 교수(이하 김)=나는 5번째 집회부터 계속 나갔다. 마치 뭔가 알 수 없는 부름에 끌려갔다고나 할까. 상당히 내가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고 있구나, 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촛불집회는 하나의 촛불혁명이면서 '촛불 학교'였다. 이 촛불의 열기가 제대로 결실을 맺도록 하는 데 나 자신도 기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데모 학교'에 출근하고 있다.▲ 곽노현 이사장(이하 곽)=한번 빼고 개근했다. 갈 때마다 역사가 이렇게 만들어지고 진군하는구나 싶었다. ‘나 하나쯤이야’를 극복하고 ‘나 하나라도’마음으로 나온 동료시민들을 볼 때마다 강렬한 신뢰와 연대를 느꼈다. 이심전심의 촛불바다에 들어서면 마음이 따뜻해졌다. 동료시민들을 쳐다만 봐도 흐뭇했다. 광장은 민주시민의식이 깨어나고 상호연대의식이 자라나는 거대한 정치의식화의 장이었다. 다양한 공적 주제를 놓고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집중적으로 민주시민교육과 헌법교육이 일어났다.그 결과 향후의 대한민국은 종전의 대한민국과 많이 다를 것이 틀림없다. 시민정신과 주권자의식이 깨어나서 민주주의의 미시적 토대가 탄탄해졌다. 지금까지 우리 민주주의가 1%의 전투적 시민성을 먹고 자랐다면 이제부터는 광장민주주의의 세례를 받은 95%의 온건한 시민성을 양식으로 삼을 것 같다. 특히 10대, 20대, 30대가 과반수를 차지하는 데서 희망을 발견한다. 이런 집단각성의 체험은 역사적으로도 3.1만세혁명, 60년 4.19혁명, 80년 서울의 봄. 87년 시민항쟁 등 몇 번 없었다.촛불 하나만으로 역사의 변곡점을 만들어낸 집단체험은 오랫동안 바람직한 변화를 위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10대, 20대, 30대가 깨어난 덕분에 우리사회는 앞으로 제왕적대통령에 맞서는 정치혁명을 넘어 양극화에 맞서는 사회경제혁명, 나아가서 권위주의에 맞서는 문화혁명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김영호 전 산자부장관
-과거 국민항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김=나는 4ㆍ19에도, 6ㆍ3항쟁에도. 87년 6ㆍ10항쟁에도 그리고 이번 촛불데모에도 한국 현대사를 바꾼 데모 릴레이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6·10 항쟁 때도 거대한 넥타이 부대의 대해 속에서 시위를 했다. 그런데 이번 시위가 과거의 데모와 다른 점은 성숙한 시민의식, 적극적 시민사회를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시민이 한국에서 성숙하고 적극적이 되었다는 것은 대의제의 투표참여 이상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6ㆍ10항쟁으로 직선제가 도입된 것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시민항쟁에 의해 정권이 교체된 것, 또 그 후에 정권의 정기적 교체를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이룬 대단한 성과였다. 6·10항쟁의 성과는 아시아민주주의의 한 도달점이었다. 그러나 87년 항쟁은 아직 시민이 성숙하지 못한 것이었고 중산층 넥타이 부대 중심이었다. 6월항쟁은 7,8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연결되지 않았고 따라서 경제적 민주화 없는 정치적 민주화에 그친 반쪽짜리 민주화였다. 그것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지금의 촛불 항쟁은 ‘시민 없는 민주주의’, ‘시민사회 없는 자본주의’에서 ‘시민 있는 민주주의’, ‘시민사회 있는 자본주의’로 가는 전환점이 되고 있는 듯하다. 다만 Voting Democracy로 만족하지 않는 Voicing Democracy로, 참여의 도구로 모바일과 SNS라는 새로운 방법이 이용되고 있어 일종의 SNS Democracy의 신경지가 기대되고 있다 그럼에도 참여의 방법은 아직 발명하지 못하고 있는 답답함이 있다. 어떻게 이를 발명할 것인가. 그걸 발명하면 한국을 넘어 세계사적 발명이 될 것이다.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 곽=이번 촛불혁명의 경과는 종전의 정치혁명과 확연히 다르다. 과거엔 몽둥이와 쇠파이프, 화염병을 들었다면 이번에는 촛불만 들고 최고권력자를 몰아냈다. 2008년 광우병쇠고기반대광장에서 많은 시민들은 헌법 제1조를 살아 꿈틀거리는 실체로 집단 체험을 했다. 이때부터 시민자유발언이 시작했고 유모차부대가 등장했다. 당시의 정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에 실렸다. 2년 지나서 트위터, 페북, 카톡 등 SNS가 나왔고 그 덕분에 이번 촛불집회는 2008년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의사소통과 자료공유가 종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고 대규모로 이뤄졌다. 시민예술가들이 포스터, 노래, 안무 등 다양한 예술 형태로 신랄하고 통쾌한 정치풍자와 패러디를 만들어냈고 SNS가 삽시간에 퍼뜨렸다. 이것이 시민참여를 이끌어내고 지속시킨 수훈갑이었다. 흥겨운 ‘하야가’없는 광장을 상상할 수 있겠나. -촛불은 주권자 혁명으로 불린다. 국민을 주권자로 재정립하는 것과 함께 '혁명' 과정에서 주권자가 주도하기 위해서는?▲ 김= 과거 독일의 구 동독에서 통일 직전에 동독 정부가 통일을 안 하는 방향으로 후퇴한 적이 있다. 그때 시민들이 '우리가 주권자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를 들고 나와 들고 일어섰던 것이 브란덴부르그 문을 열어젖혔다. 우리의 촛불 혁명은 그와 비슷한 유사성이 있으면서도 그보다 진전된 것이다. 우리는 정책의 결정과정에까지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촛불의 참여민주주의는 단순한 참여만이 아니고 대의민주제에 대한 견제 역할까지 하고 있다. 청와대, 국회, 사법부, 기업을 견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참여와 견제의 방법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 점에서 머뭇거리는 시행착오를 겪는 상황에 서 있는 듯하다. 과연 참여민주의 방법을 발명해 점프시키느냐가 과제인데 그 점프가 쉽지는 않다. 그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면 지리한 혼란이 올 것이다.▲ 곽=촛불혁명의 특징 중 하나는 조직적인 지도부가 없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SNS로 정보를 얻고 최대한 가볍게 참여했다. 그렇지만 조직되지 않은 광장의 힘만으로는 한계도 뚜렷하다. 무엇보다 광장은 토론하거나 숙의하는 공간이 아니다. 시민들은 ‘우리가 상전이다’, ‘우리가 갑이다’라는 주권자의식을 몸으로 깨달았지만 여전히 광장에 나가고 투표하는 것 외에 마땅하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직접민주적인 제도가 너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국민발안, 국민소환, 국민투표 등 직접민주적 제도 자체가 없는 것은 문제다. 현재로서는 국민투표도 오직 대통령만이, 그것도 국가안위 관련 사항에 대해서만 부의할 수 있다.아무리 직접민주주의적인 권리와 제도를 완비해도 그건 최후의 수단일 뿐 실효성 확보가 몹시 힘들다. 그래서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도록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 대의권력의 상호견제와 균형을 위해서는 사법부 독립이 정말 중요하다. 검찰과 법원이 정권이나 재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과 원칙에 따라 판단하면 권력남용과 정경유착이 발붙이기 어렵다. 제왕적대통령이란 것도 정치검찰과 정치법원의 뒷받침을 받아야 성립가능하다. 사법부가 독립하면 제왕성의 절반은 사라지게 돼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게 선거제도를 바꾸고 정당체질을 바꿔서 의회를 강화하는 거다. 선거제도 개혁의 핵심은 정당득표율에 따라 국회의석 수가 배분되도록 고치고 소선거구제를 손보는 것이다. 이래야 다양한 소수의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고 정치이념과 가치가 다원화될 수 있다. 이래야 정당 간 타협과 협치도 가능해진다.정당체질을 바꾸고 정당민주주의를 강화하려면 무엇보다 공무원과 교사의 정당가입과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선 1등 시민의 모든 조건을 갖춘 공무원과 교사 150만 명이 정당활동을 전혀 못하게 돼있다. 1등 시민들의 정당가입을 금하는 이상 정당체질과 정당문화를 바꾸지 못하고, 정당체질과 정당문화를 바꾸지 않고는 정당민주주의가 불신과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 자체가 안 된다.▲김= 박근혜-최순실의 횡포 구조는 한국의 정치권력, 검찰, 재벌, 언론의 지배연합에 한국 시민사회가 갇혀 있고 민주주의, 자본주의가 갇혀 있는 지배 부패구조이다 이 구조를 깨지 못하면 민주주의도, 자본주의도, 경제도 성장 못한다. 박근혜 탄핵 이후 국민들의 정열이 다소 소강상태로 돼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불길이 이 지배연합구조의 혁파에 옮겨 붙어야 한다. 불이 옮아붙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비전을 선명하게 나타낼 필요가 있다. 그 점에서 헌재가 재판을 언제 어떻게 할지 모른다는 점이 지금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불길을 옮기게 하는 기회일 수도 있다. 한국의 지식사회와 촛불 지도부가 어떻게 불길을 옮기게, 목표를 주권자 혁명으로 옮기게 할지 역사적 고민을 해야 한다.지금은 대의제와 광장민주주의, 투 트랙의 대실험기다. 광장 민주주의를 살리되 포퓰리즘은 경계하자. 촛불혁명에서 집단지성의 분출을 기대하는 이상으로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한다. 집단지성의 분출은 어렵고 포퓰리즘의 횡행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광장혁명은 포퓰리즘의 횡행으로 ‘죽 써서 개 준다’는 사태가 오거나 아울러 지리한 분열로 동력이 상실될 수도 있다. 나는 찬박 데모로 극우반동이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을 우려한다. 국회에서 새 총리 지명으로 정부를 바꿨으면 이런 사태가 방지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촛불데모 지도부가 공고하지 않은 것이 순수성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취약점을 말해주기도 한다. -광장의 시민의 힘을 조직화하는 방법으로 ‘시민의회’‘시민평의회’‘주권자회의’등이 제기·논의되고 있습니다. 곽 이사장님께서 이에 대해 집중적인 논의를 펼치고 계시는데요?▲ 곽=광장에서는 말씀하신 의제들을 토론하거나 숙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의회 역시 너무 멀고 높이 떨어져 있어서 일반시민에게는 너무나 먼 당신이자 불신의 대상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광장과 의회 사이에, 일반시민의 눈높이에서 사회현안을 토론할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어내자는 제안들이다. 현재 시민의회와 지역민회, 두 가지 구상이 나와 있는 상태다. 시민의회는 선거로 뽑힌 엘리트중심 의회가 아닌 추첨으로 뽑힌 일반시민 중심 의회를 의미한다. 대개 국회의원 정수와 동수로 구성해서 국회의원이 이해충돌 때문에 공정하게 처리하기 어려운 사안에 의견을 내게 한다. 선거구 획정, 선거법이나 선거제도 개혁, 정치자금제도 개선, 의원보수 결정, 의원특권 축소 등이 좋은 예다. 전문가의 보좌와 지원을 받는 가운데 치열한 내부학습과 숙의과정을 거쳐 시민의회가 처방전을 내놓을 경우 의회와 여론이 그 제안을 쉽게 무시하기 어렵다. 아일랜드와 핀란드, 캐나다와 호주의 일부 주 등에서 제한적으로 실천된 사례가 있다.저는 지금 필요한 건 하나의 시민의회가 아니라 수십, 수백 개의 지역민회라는 입장이다. 작금의 촛불혁명 국면에서는 강렬한 참여욕구와 발언의지를 가진 일반시민이 수십만, 못해도 수만은 된다. 이분들은 촛불혁명이 대통령 실각과 정권교체를 넘어 피폐한 사회경제적 삶의 구체적 조건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기를 바란다. 이런 기대와 열망을 최소한의 시민개혁요구로 이끌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국 여의도정치인들만 배불려놨다는 탄식을 되풀이하기 쉽다.제가 생각하는 지역민회는 17개 시도가 됐든 226개 시군구가 됐든 최대한 많은 지역에 시민의회를 둬서 동일의제를 놓고 동시다발로 토론한 후 표결을 통해 시민의사를 집계하자는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추첨으로 한번 구성되면 일정기간 그 사람들로 운영되는 이론상의 시민의회와 달리 제가 지금 국면에서 요구된다고 생각하는 지역민회는 적극적 시민은 누구라도 올 수 있고 관심의제에 따라 얼마든지 들락날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방형, 비추첨형이다. 광장의 열기를 실용적으로 이어나가고 시민의 정치적 조직화를 최대한 진행시키려면 이렇게 해야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한번 상상해보라. 선거제도개혁, 재벌개혁, 비정규직정책, 검찰개혁 등 우리사회의 개혁의제에 대해 매주 하나씩 226개 시군구에서 동일의제를 놓고 100명에서 300명의 적극적 시민이 모여 열띤 토론을 진행해서 결과를 집계하고 발표한다 치자. 전국적으로 5만 명에 가까운 적극적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제공된 다양한 토론자료를 학습하고 와서 궁금한 게 있으면 전문가들에게 질문하며 입장을 정해 간다고 치자. 그 결과를 정치권과 언론이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본래 이런 대대적인 학습토론과 정책제안 역할은 정당과 노조의 몫인데 우리나라에선 정당과 노조가 지금 같은 비상한 참여국면에서도 이런 역할을 조직할 엄두를 못 낸다. 그래서 광장과 의회를 이어줄 지역민회라는 비상한 공론장이 조직될 필요가 있다.- 촛불을 통해 드러난 경제사회적 개혁 과제들은 어떤 게 있을까요?▲곽=이번에 박-최 국정농단 헌정유린이라는 게 실제로는 두 사람에게 농단을 당했다고 볼 수 있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재벌 검찰 언론 등이 얽혀 있다. 최소한 정치권력의 재편을 넘어서 정경유착형 부패를 근절하자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이번엔 보수언론이 앞장서서 끌어온 측면이 있지만 이번 일이 터지기 전까지 이들이 얼마나 박 정권을 비호해 왔나. 언론 방송개혁도 과제다. 검찰은 이루 말할 게 없다. 십상시 사건만 제대로 수사했어도 달랐을 것 아닌가. 이번 정권은 정치국정원과 정치검찰로 언론과 재벌을 장악해온 유사 유신체제다. 이번 사태는 이념적으로 박정희 개발패러다임을 극복할 수 있는 중대한 계기다. 언론개혁, 재벌개혁, 검찰개혁, 정당개혁, 이런 개혁들을 해야 한다는 건 다 합의돼 있다. 방향과 내용에 대해서도 웬만큼 다 나와 있다. 정치권이 입법과 정책으로 할 일을 하면 된다. 지난 60일간 깨어난 시민들의 주인의식과 정치역량, 상호신뢰와 자부심이 강해서 종전처럼 쉽게 개혁 국면이 실종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바짝 경계는 하되 비관하지 않으면 좋겠다.▲김='적극적 시민사회', 그 용어를 나는 요즘 즐겨 쓴다. 지금의 시민사회의 '보팅(투표) 디모크라시'만으로는 정치권력, 매스컴, 정치집단, 기업집단의 지배연합의 포로에 불과하다. 이번 사태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싸움에서 민주주의가 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정경유착이 발생한 것이다. 87년 6월 항쟁에서 직선제를 달성한 것은 큰 성과지만 대통령제가 갖고 있는 거대한 권력 견제 장치도 없고 경제민주화는 실현하지 못한 채 시민사회도 성숙하지 않은 것에서 그런 유착이 발생했다. 대의제의 한계를 노출한 것이다아울러 지금 '박정희 패러다임의 극복'을 얘기하는데 지금은 거대재벌이 대통령 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병존해 있거나 심지어 그 위에 있기도 한다. 대통령은 짧고 재벌은 길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이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거래하는 관계다. 거대재벌은 거대대통령제로 콘트롤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 시민사회로 콘트롤해야 한다 지금처럼 언론이 재벌 손아귀에 들어가면 시민사회는 정치권력 재벌 언론 검찰 등 지배연합의 포로 신세를 벗어나기 어렵다. 나는 촛불혁명이 탄핵국면을 넘어 국가 대개조국면으로 옮겨 붙어 헌법개정으로 결실되지 않으면 재벌개혁과 선진국진입은 사실상 불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민주주의가 위기다. 그걸 해결하는 것은 적극적 시민사회밖에 없다. ‘시민사회가 콘트롤하는 민주주의’, ‘시민사회가 콘트롤하는 자본주의’를 달성해야 한다. -올해는 87년 30주년인데 87년 헌법의 개정론이 제기되고 있다. 개헌의 필요성, 그리고 개헌 논쟁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곽=저는 기본적으로 개헌보다는 개혁이 당면과제라는 입장이다. 우리나라의 지배구조를 바꾸려면 재벌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다. 헌법의 권력구조를 바꾼다는 것은 주권자시민과 대의권력의 관계를 바꾸고 대의권력 상호관계를 바꾸자는 건데 여기에는 재벌이라는 실질적인 권력 주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빠져 있다. 재벌개혁 없이, 즉, 재벌의 사회경제적 지배력 약화 없이 권력구조 바꿔본들 지배구조의 일부만 손보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렵다.제왕적 대통령제를 바로잡자는 개헌논의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보다 제왕적인 게 사실이다. 미국 대통령은 권한도 우리보다 다소 약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의회와 사법부의 견제가 훨씬 강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제왕적 대통령을 바로잡는 길은 뭐냐. 첫째는 사법부 독립의 보장이자 제왕적 대법원장의 인사권 통제다. 우리나라의 대법원장은 모든 법관에 대해 승진, 전보권을 갖고 있는 막강한 제왕적 존재다. 제왕적 대통령은 제왕적 대법원장이 협력하지 않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둘째, 지방분권이 안 돼 있는 것이 문제다. 재정과 권한으로 지방자치를 훨씬 더 강화해서 공적세계에서 대통령과 중앙정부의 비중을 대폭 줄여야 한다. 대통령과 의회만의 권한재분배에 초점이 맞춰진 권력구조중심 개헌은 촛불민심이 요구하는 지배체제 개편에 턱없이 못 미친다. 끝으로 권력구조 개헌을 대선 전에 해치우자는 일부 정치인의 주장은 권력분점 욕구의 산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촛불시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촛불시민들이 개헌이 급선무라고 하는가. 국회의원 200명 이상을 모아 개헌을 추진할 힘이 있다면 그 힘으로 먼저 선거제도개혁, 검찰개혁, 언론개혁, 재벌개혁 등 개혁입법부터 맹렬하게 해야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민주도형, 시민참여형으로 진행하지 않는 이상 개헌은 구태여 시작하지 않는 게 낫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게 헌법 탓이겠는가, 헌법유린 탓이겠는가. 그렇다면 헌법유린이 만연한 게 헌법 탓이겠는가, 정치인과 공직자, 전문가들 탓이겠는가. 한마디로 지배엘리트들의 체질과 문화가 출세주의적이고 권위순응주의로 굳어진 탓 아닌가. 저는 대선 전 개헌론이 촛불혁명의 완성은커녕 반동으로 가는 길을 열 것으로 우려한다.▲김=개혁의 총체적인 매듭은 개헌으로 완결지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의 거대한 촛불이 그럴 수 있는 결정적인 찬스다. 지금의 사태가 단순히 박-최의 개인적 잘못만이 아니고 시스템의 잘못이라면 그 중 가장 큰 것이 헌법이다. 국회의원들은 변명의 기회만 되고 있는 청문회에 쏟는 에너지를 가지고 개헌을 해 보라. 정치 계산만 없으면 개헌은 충분히 가능하다. 지금의 기회를 놓치면 이런 찬스가 다시는 오기 힘들다.개헌은 역사상 시민혁명의 산물이다 시민혁명의 계기가 사라지면 정치인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위임된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중 당선되면 임기 중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공약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가. 나는 지금 개헌연기론은 사실상 개헌포기론의 위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개헌 한다고 하면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할까?▲ 김=개헌은 결국 권력구조 개편론인데 나는 대통령 권력 견제와 주권자의 기본권 신장에 초점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6.10항쟁의 산물인 대통령 직선제는 유지하면서 책임총리제를 살려 보완하고 6.10항쟁 때 못한 경제민주화를 주권자의 생활기본권 확충의 형태로 강화했으면 한다. 헌법의 핵심가치인 민주공화제를 경제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조항 말이다. 이것이 양극화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스스로의 존립기반을 무너뜨리는 자본주의를 구하고 선진국이 되는 첩경이다.▲곽=재벌을 통제할 수 있는 정치권력은 대통령이 유일하다. 분권형개헌을 하면 그나마 재벌을 제어할 정치권력이 사라지거나 약화된다는 게 걱정이다. 그래서 저는 이번 대선에서는 개혁대통령이 나와서 시민권력과 손잡고 시대적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본다.현재로서는 모든 후보들이 개헌구상과 일정을 약속할 수밖에 없다.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결코 전능하지는 않지만 일반시민들의 집단지성이 살아나면 전능에 가까워진다고 본다. 만약 개헌이 국민들의 뜻이라면 어떤 상황이 와도 대통령이 된 사람이 자신의 개헌공약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김=문재인 전 대표만 개헌을 약속하면 된다고 본다. 문재인 대표 측에서 얼른 생각을 바꿨으면 한다. 의회권력과 민중권력의 이중구조, 투 트랙으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스페인의 포데모사 운동이라든지 이태리의 파이브 스타 운동 같은 것을 참고로 해 민중권력의 제도화를 이뤄내는 게 중요하다.▲곽=대의민주주의 자체는 대체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대의민주제가 최대한 발전하게끔 지원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비례대표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민회민주주의와 온라인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이런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지금의 승자독식 대의민주제를 대대적으로 수정, 보완해야 한다. 이 경우 우리나라에서 전 세계에 유례없는 민주주의 혁신이 나올 수 있다. 지난 촛불혁명 덕분에 스페인 포데모사나 이탈리아 오성운동보다 더 깊고 강하게 민주주의를 실질화 할 수 있는 대대적인 시민의식의 각성이 이뤄졌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말씀은?▲김=현재 한국을 둘러싼 환경은 너무 어렵다. 세계 권력을 트럼프, 푸틴, 아베 등 '깡패'들이 쥐고 있다. 그들 깡패 손아귀에 한국의 운명이 맡겨져 있다. 이걸 돌파해야 하는데 돌파하기 힘들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그 돌파구가 될 수 있는 게 시민사회의 콘트롤 하에 놓이는 자본주의를 한국에서 할 수 있느냐, 다시 말해 '기업 시티즌십'을 확립할 이번의 좋은 기회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느냐다. 지금의 재벌개혁의 호기를 잘 살려야 한다. 삼성물산 합병과 관련해 국민연금이 부정한 지원을 한 점을 검찰이 제대로 밝혀내고 그것을 삼성의 지배구조를 바꾸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이참에 삼성의 대주주인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행사하여 촛불혁명이 삼성의 주주권을 행사하는 일을 벌릴 수 있을 것이다. 삼성이 바뀌면 다른 기업도 다 바뀐다. 시민의 힘, 촛불의 힘이 직접적인 압력으로, 또 특검을 통해 압력을 가해서 지배구조가 바뀌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옥시 가습기 사태, 폭스바겐 사태에서 보듯 시민파워가 없으면 결국 시민은 당한다.▲곽=중요한 지적을 하셨다. 학교민주주의와 일터민주주의가 없으면 일상생활에서 민주주의를 만나는 게 어렵다. 아무데도 민주주의가 없는데 정치영역과 국가생활에서 민주주의가 꽃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진보교육감시대가 열린 2010년 이래로 학교민주화를 중요한 정책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일터민주화는 노동조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터민주화의 최소한은 민주적 리더십과 소통구조를 확립하여 민주적 조직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한마디로 계급장이 깡패인 조직문화를 바꾸는 게 일터민주화의 출발점이다. 일터민주화는 노동조합이 없이는 좀처럼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다. 노동조합 조직율이 10%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90%의 직장인은 윗선의 인품 외에는 기댈 곳이 없다. 비정규직의 경우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번 사태로 권력 앞에서 당당해진 10대, 20대, 30대는 학생회나 노조를 결성하고 강화하는 일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될 것 같다. 교육당국과 사용자도 이들의 교실민주화와 일터민주화 요구에 좀 더 과감하게 반응해야 할 것이다. 촛불혁명이 궁극적으로 학교와 일터의 탈권위주의 조직문화로 나아가는 원동력을 제공할 것으로 전망한다.▲ 김=적극적 시민사회가 열리기를 무엇보다 기대하고 있다. 특히 우리 주변국가인 일본, 중국, 대만 모두 국가주의가 시민주의를 제압한 상태다. 한국의 촛불은 '시빌 아시아(Civil Asia)의 큰 계기가 될 수 있다. 그것이 한국이 사는 길이고 아시아가 사는 길이다.지금 동아시아는 산업화와 정보화의 결과 약 10억의 중산층과 네티즌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이 시민혁명을 하면 앙샹레짐의 기득권층이 붕괴한다. 따라서 기득권층이 안보내셔널리즘, 영토내셔널리즘, 역사내셔널리즘으로 국가주의를 고취한다. 그 결과 적대적 상호 의존구조 속에 군비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다. 2014년에 한국이 미 군산복합체에서 무기를 9조, 2015년에 8조원 구입했는데 일본은 더하다. 북한과 중국의 국방비 증액은 그보다 더하다. 이렇게 싸울 이유가 없다. '10억 시빌 아시아'로 바뀌면 이 돈이 시민복지 부분으로 가 아시아가 살판난다. 그래서 나는 늘상 아시아의 주권자여 단결하라고 말한다. 과거 3.1운동이 중국의 5.4 운동, 인도의 스와라지운동을 촉발했듯이 이번 촛불혁명이 시빌 아시아의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 나는 사드배치를 반대하는 야당이 중국의 노골적인 압력에 대해서 우리의 사드반대가 촛불혁명정신에 따르는 것인데 마치 중국의 압력에 굴복해서 하는 것 같은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중국은 즉각 중단하라는 성명을 내는 것을 검토했으면 한다. 아울러 일본의 위안부공세에 대해서도 일본은 한국의 천만촛불을 택할 것인가 주권을 대변하지 못한 부패정권을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 일종의 촛불외교전략을 구상해 봄직하다 이것이 시빌 아시아를 여는 촛불전략이기도 하다. * 김영호 교수는 경북대 교수, 도쿄대 교수 등을 역임한 원로 경제학자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2000년에는 산업자원부 장관을 맡아 한국의 산업·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 후 유한대학 총장, 중소기업시대포럼 공동 대표,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이사장 등을 지냈다. ‘시민 연대에 의한 시빌 아시아(Civil Asia)’를 꾸준히 모색하고 있다.* 곽노현 이사장은 서울의 첫 '진보 교육감'으로 방송통신대 교수,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비밀정보기관의 민주적 통제와 과거청산 등의 시대적 요구를 부여잡고 이론적, 실천적으로 씨름해왔다. 지금은 (사)징검다리교육공동체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에 민주시민성을 충전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대담 진행=이명재 편집위원 pr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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