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클래식 축제 런던 BBC 프롬스
BBC 프롬스. [사진=Chris Christodoulou]
서구의 클래식 시즌은 유럽의 축구 리그처럼 가을의 길목에 시작해 초여름에 마감한다. 7월과 8월은 클래식 연주가들에겐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재충전의 시간이다. 그런데 음악가들은 명승지에 가서도 관광객처럼 객수를 풀지 못한다. 2박 3일의 짧은 여정이라도 피아니스트는 숙소 근처에 연습실을 구하고, 현악주자는 객실의 방음이 연습하기에 괜찮은지 호텔 관계자와 씨름하는 게 일상이다. 그래서 세계 각지의 페스티벌 감독들은 음악가들이 자신들의 고장에서 연주도 하고 휴식을 보내라며 섭외 경쟁을 벌인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잘츠부르크는 다양한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실내악 공연을 묶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가장 선망하는 축제다. 오페라 가수들은 오스트리아 서부의 호반 도시에서 열리는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러브콜을 기다린다. 충격적인 무대 디자인과 빼어난 자연, 오페라에 심취한 관객들이 만드는 분위기가 일품이다. 바그너 전문 가수들은 마니아 관객이 가득한 독일 바이로이트 축제에 서는 게 꿈이다. 온천을 즐기고픈 가수들은 독일 바덴바덴 페스티벌을 선호한다. 풍경은 브레겐츠와 비슷하지만 청중의 고고한 품위가 바이로이트에 버금가는 곳은 스위스 루체른이다. 그곳엔 세계 최고의 악단 연주자들로 구성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있다. 미국 올림픽 농구 국가대표처럼 '드림팀'으로 부를 만한 세계 유일의 악단이다. 7ㆍ8월 극장 종사자들이 모두 휴가를 떠나 클래식 공연이 아예 없는 파리와 달리 런던은 세계 최대 규모의 클래식 페스티벌, '프롬스'로 관광 도시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신인들은 '클래식의 수도' 런던에 교두보를 마련하려고, 중견과 거장들은 자신들의 이름값을 전 세계로 알리는데 프롬스 출연을 선용한다. 서울시향도 정명훈의 지휘로 지난 2014년 데뷔했다.
사카리 오라모 [사진=Chris Christodoulou]
122년 역사의 BBC 프롬스는 지난 7월 5일, 축제 직전 일어난 프랑스 니스 테러를 추모하는 뜻에서 사카리 오라모와 BBC 심포니가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하는 것으로 9월 10일까지 9주간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페스티벌 동안 메인 공연장인 로열 앨버트 홀(입석 1500석 포함 약 6000명 수용)과 런던 도심 첼시에 있는 카도간 홀(900석)에서 총 90여 차례의 오케스트라와 실내악, 팝 공연이 열린다. 평균 5000여 관객이 두 달 넘게 매일 로열 앨버트 홀을 찾는 데서 '세계 최대의 클래식 축제'의 위용을 실감한다. 개막공연이 열린 로열 앨버트 홀의 아레나엔 프랑스 국기가 등장해서 영불 간의 연대감을 나타냈지만, 올해 프롬스 주변엔 브렉시트로 인한 불안감이 팽배하다. 정치적으로 고립을 선택한 결정이 영국 클래식계에 어떤 파장을 미칠지 이해 관계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런던에 본사를 둔 대형 매니지먼트사 해리슨 패럿은 6월말 자국의 문화부장관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브렉시트가 초래할 전반적인 클래식 경기 위축을 경고했다.
안토니오 파파노. [사진= Chris Christodoulou]
헨델과 하이든 시절부터 런던이 누려온 클래식 수도의 위상이 브렉시트로 줄 것이라는 위기감은 영국 지휘자 안토니오 파파노 로열 오페라 음악감독의 발언에서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브렉시트로 유럽연합(EU)에서 영국의 음악학교와 연주단체로 유입되는 우량 인재들이 급감할 것이고, 영국 클래식 시장의 질적 하락은 불가피하다는 게 파파노의 주장이다. 프롬스의 프로그래밍도 예년에 비해 다소 어수선한 편이다. 2008년부터 프롬스 감독을 지내며 수익에서 탁월함을 보인 로저 라이트 전 BBC 라디오 3 총국장의 후광이 짙은 나머지, 후임 감독들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올해부터 프롬스 사령탑에 오른 데이비드 피카드 전 글라인본 오페라 감독의 독창성은 아직까지 프로그램에 뚜렷하게 반영되지 않았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 현지 미디어가 주목한 공연은 팝스타 데이비드 보위를 추모한 7월 29일 '레이트 나이트 프롬스'다. 밤 10시 15분에 시작된 심야공연은 준비한 6000여석 모두 매진됐고, 흥겨운 분위기 속에 고인을 추억하는 자리가 되었다. 2006년 보위가 직접 섰던 로열 앨버트 홀 자리에, 10년이 흘러 그를 기리는 음악인과 시민들이 함께 서 있었다.
브린 터펠 [사진= ChrisChristodoulou]
페스티벌 초반, 축제의 분위기를 무르익게 한 건 지휘자 파파노와 로열 오페라 오케스트라가 함께한 7월 16일 무소르그스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였다. 평소 코벤트가든 극장에서 이 공연을 보려면 평균 100파운드(한화 약 14만원)를 지불해야 하지만, 프롬스에선 6파운드(한화 약 8000원)로 웨일즈의 스타, 바리톤 브린 터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공연 시작 두 시간 전, 로열 앨버트 홀에 가면 홀의 밑바닥인 아레나와 맨 위층 갤러리 좌석을 6파운드에 살 수 있는 줄이 있다. 버섯(mushroom)이라는 애칭을 가진 홀의 음향 보정 장치가 천장에 달려 있어서 갤러리에 누워서 들어도 성악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프롬스 초반의 또 다른 주역은 '마린스키의 차르'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였다.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런던 심포니(LSO) 수석 지휘자를 맡은 게르기예프는 지난해부터 새로 감독을 맡은 뮌헨 필하모닉과 런던을 찾았다. 두 해 전, 자신이 감독하는 또 다른 악단인 '월드 오케스트라 포 피스' 공연은 실망스러웠다. 마치 맹독을 잃은 독사처럼 매끈하지만 기운 빠진 모습이 역력했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별 두개로 갈기 빠진 차르를 힐난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 [사진=Chris Christodoulou]
그러나 뮌헨과 함께 하는 게르기예프는 달랐다. 무엇보다 다양한 러시아 레퍼토리를 아우르는 게르기예프의 엄청난 소화력에 영국 미디어들이 다시금 탄복했다. 갈리나 우스트볼스카야(Galina Ustvolskaya)의 교향곡 3번처럼 소련 시대의 향수를 담고 있는 희귀작을 당시의 정서에 기반을 두어 요즘의 감각으로 풀어내는 마에스트로는 이제 게르기예프뿐이다. 가디언은 별 넷을 부여했다. 그해 프롬스가 가장 중요시하는 지휘자를 보려면 폐막공연의 지휘봉을 누가 드는지 확인하면 된다. 올해 '라스트 나이트 오브 프롬스'는 개막공연의 주인공 오라모가 지휘한다. 오라모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감독 에사 페카 살로넨과 함께 2000년대 중반부터 런던 메이저 오케스트라를 장악한 핀란드 지휘자군의 선두주자다. 오라모의 음악성이 무르익은 건 지난 10일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여러 차례의 프롬스 경력으로 공연장의 음장감을 노련하게 이용했다. 목관에는 투명함을, 현악에는 화려함을 부여하면서 6000 관객을 상대로 공간 안에 양감을 빚어내는 세기가 놀라웠다. 감독 3년차가 지나면서 이제 BBC 심포니는 오라모의 완전한 수족이 된 느낌이다. 프롬스의 주축 악단은 BBC 산하의 다섯 개 악단들이다. 런던에는 BBC 심포니와 주로 발레-오페라 반주를 주로 맡는 BBC 콘서트 오케스트라가 있다. 맨체스터에는 BBC 필하모닉,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에 BBC 스코티시 심포니, 웨일즈의 카디프에 BBC 웨일즈 내셔널 오케스트라가 있다. 이들의 평소 기량은 BBC 아이플레이어를 통해 해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프롬스의 잔여 스케줄을 보면 올 가을 한국을 찾아가는 연주가들도 눈에 띤다. 오는 29일엔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지휘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한다. 블롬슈테트는 오는 10월 26, 27일 독일 밤베르크 심포니와 그의 나이 89세에 처음 한국을 방문한다. 쉬프는 10월 23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변주곡을 연주한다. 오는 9월 1일엔 고음악 전문가 윌리엄 크리스티와 그의 악단인 레자르 플로리상이 바흐 B단조 미사로 로열 앨버트 홀에 오른다. 크리스티와 레자르 플로리상은 오는 10월 15일 서울 롯데 콘서트홀에서 23년 만에 두 번째 내한공연을 한다.런던=한정호 아시아경제 객원기자<ⓒ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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