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X파일] “납치범이 저를…” 다급한 신고에 경찰은…
‘납치신고’ 받고 단순 상해로 축소보고…납치범 두 번째 범행 자초, 인질 살해 비극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div class="break_mod">‘법조 X파일’은 흥미로운 내용의 법원 판결이나 검찰 수사결과를 둘러싼 뒷얘기 등을 해설기사나 취재후기 형식으로 전하는 코너입니다.
2010년 6월16일, 112신고센터에 다급한 목소리의 신고가 접수됐다. “납치범에게 도망쳐 나왔다.” 장난 전화가 아니었다. 경찰이 현장에 출동하자 여성 A씨가 그곳에 있었다. A씨가 경험한 사연은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악몽이었다. A씨는 대구의 한 아파트 앞에서 걸어다가 어느 승용차에 의해 교통사고를 당했다. 운전 미숙에 따른 결과물이었을까. 운전자 김모씨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김씨는 승용차에 부딪힌 A씨의 머리채를 잡고 차량 뒷좌석으로 집어넣으려했다.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 목을 졸라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 A씨는 극한의 상황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승용차 뒷좌석 반대편 문을 열고 달아났다. A씨는 인근 아파트 경비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렇게 119신고센터에 신고하게 됐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A씨 얘기를 상세히 들었다. 하지만 당시 경찰 지구대 순찰팀장은 이 사건을 납치미수사건이 아닌 단순 상해사건으로 상부에 축소 보고했다. 납치범의 존재 사실을 왜 숨기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축소보고는 훗날 끔찍한 사건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정확히 일주일 후, 6월23일 사건이 일어났다. 김씨는 다시 대구시 일대를 돌아다니며 범행의 대상을 물색했다. 20대 여성 B씨가 그 대상이었다. 김씨는 B씨를 승용차에 태우는 데 성공했다. B씨가 남자친구에게 전화하려고 하자 김씨는 마구 때리고 몸을 묶어 차량 뒷좌석에 놓았다. 외부에서 볼 수 없도록 했다.
김씨는 B씨 휴대전화를 이용해 부모에게 전화를 했고, 6000만원을 요구했다. B씨 부모는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다. 김씨는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당하고 있었다. 경찰이 꼼꼼하게 대처했다면 김씨의 검거는 시간문제였다. 경찰은 B씨 부모에게 200만원을 보내도록 했다. 김씨가 돈을 인출하도록 유도했다. 경찰은 현금지급기 CCTV를 통해 김씨의 인상착의를 확인했다.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경찰은 김씨가 다른 곳에서 현금인출을 시도한다는 것을 파악했다. 이제 김씨를 검거하는 일만 남았다. 그 계획이 성공하면 납치된 B씨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경찰 형사기동차량은 드디어 김씨로 보이는 의문의 차량을 발견했다. 용의차량 10m 후방 길 건너편에 차량을 정차했다. 형사 3명이 김씨의 차량으로 다가갔다. 김씨는 무전기로 보이는 물건을 휴대한 사람이 내리는 것을 보고 형사라고 직감해 승용차를 급발진시켜 도주했다. 찾고 있던 납치범을 검거하는 기쁨에 취했던 것일까. 어이없이 범인을 놓치고 말았다. 경찰은 도주로를 차단하거나, 지원을 요청하는 등의 기본적인 조치조차 없이 막무가내로 용의차량에 접근하다가 김씨를 놓쳤다. 김씨는 대구 시내에서 일주일 간격으로 두 차례나 납치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인물이다. 그의 차량 뒷좌석에는 20대 여성 B씨가 묶인 채 누워 있었다. B씨 부모는 경찰을 믿고 신고를 했는데, 범인은 경찰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 버렸다. 결국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은 현실이 돼 버렸다. 김씨는 B씨 부모에게 전화를 했다. “경찰에 신고했네, 쫓기고 있다. 고마워.”
대법원
김씨는 그 말을 남기고 전화기를 꺼버렸다. 이제 휴대전화를 통해 김씨 위치를 추적하는 방법은 선택할 수 없다. 김씨는 B양을 살해했다. 시체는 고속도로 인근 수풀이 우거진 배수로에 버렸다. B씨는 그렇게 안타까운 삶을 마감했다. A씨의 납치사건, 그 다급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또 다른 납치대상을 물색하고자 도심을 활보하는 상황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김씨의 인상착의와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을 때 조금 더 신중한 대처와 계획적인 검거작전을 전개했다면 B씨의 목숨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대법원은 경찰의 미숙한 대응으로 B씨가 숨진 사건과 관련해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첫 번째 납치신고를 축소 보고한 행위와 두 번째 사건에서 미숙한 일처리로 납치범을 놓쳐 사람의 목숨을 잃게 한 책임이 있다는 얘기다. 법원은 선고 이유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납치미수사건에서부터 경미한 상해사건으로 다루는 바람에 (김씨가) 납치미수사건이 발생한 인근 지역에서 추가적인 범행을 저지르는 것을 방지할 기회를 상실했다.…경찰공무원이 그 권한을 행사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아니한 것은 합리성이 전혀 없어서 직무상의 의무를 위반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고, 이로 인해 망인이 사망하는 결과에 이르렀다.”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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