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여담]무신론자에게도 신은 있다

새벽 출근길 택시를 타는 순간 아차, 싶었다. 나무아미타불…. 불경 소리 쩌렁쩌렁한 이곳은 택시인가, 법당인가. 마뜩잖은 기분을 눈치챘는지 택시 기사는 라디오 볼륨을 살포시 줄이는데 목탁 소리는 계속 귓전을 물고 늘어진다. '아저씨, 라디오 좀 꺼주세요!' 거룩한 무신론자로서 남의 종교를 힐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기사님, 저 조로아스터교거든요!' 존엄한 무신론자로서 거짓말을 해서는 더더욱 곤란하지 않겠나. 그러니 두 눈 질끈 감고 자는 척하거나 스마트폰을 꺼내들 수밖에. 이런 기분은 아랑곳없이 불경에 심취한 택시 기사의 해탈한 표정을 보니, 내 처지가 아득하다. 내 돈 내고 내가 탔으니 지금 저 라디오는 내 것인가 아니면 운전대를 잡은 기사님 것인가, 선승처럼 자문을 거듭하다가 급기야 '당최, 이 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없구나' 툴툴댈 때쯤 목적지에 겨우 도착해 자유를 얻었으니 큰절이라도 올려야 하나.'불교 택시'를 탄 며칠 후에는 '기독교 택시'를 타고 말았다. "하느님이 독생자 아들을…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안락과 평화를." 볼륨 높은 라디오 설교에 강건한 무신론자의 영혼은 또다시 혼미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택시 기사는 부흥회 축복을 경험한 듯한 성스러운 표정을 내내 잃지 않는 거다. 거기다 대고 '아저씨, 소리 조금만 줄여주세요' 정중하게 부탁했더니 그는 정말 진짜로 정확하게 '조금만' 소리를 줄이는 기적을 행하사 귀 막고 눈 감아봤자 새벽 설교를 피할 길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목사님 설교 목소리는 왜 다들 비슷한지, 올리브기름을 살짝 바른 것 같다는 불경스러운 잡념이 슬슬 지겨워질 때쯤 목적지에 겨우 도착해 영혼을 되찾았으니 기도라도 드려야 하나.통계를 보니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은 무신론자다. 나머지 절반은 불교 22%, 개신교 21%, 천주교 7% 순이다. 숫자는 숫자일 뿐, 어느 종교든 위대하다. 진리와 사랑과 평화에 관한 보편적인 가르침은 모든 종교가 참되다는 사실을 강변한다. 다만 그 종교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이단과 이탈이 발생한다. 거룩한 말씀을 헤비메탈 음악처럼 빵빵하게 틀어놓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길거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친다고 성령이 충만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거야말로 종교에 대한 모독이자 타인에 대한 결례다. 내 신념만큼 남의 신념이 중요하듯이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선택하지 않은 선택도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이거 아시는가. 우리 무신론자에게도 신은 있다. 마눌님이거나 자식이거나 강아지거나, 시도 때도 없이 응시하게 되는 그런 존재 말이다.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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