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우래기자
[아시아경제 노우래 기자] "위풍당당."
'커리어 그랜드슬램'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한 박인비(27ㆍKB금융그룹)의 남다른 아우라다. 지난 3일 스코틀랜드 턴베리에서 끝난 브리티시여자오픈 우승 직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지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힘이 넘친다. "아직도 구름 위에 있는 것 같다"는 소감이다. 6일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제주 삼다수여자오픈에 등판한 박인비를 오라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 만났다.
▲ "신도 내 편이었다?"=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털어놨다. 브리티시여자오픈 최종 4라운드 13번홀(파4)에서다. 티 샷이 우측으로 밀려 공이 깊은 러프에 빠졌다. "공이나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깊은 러프였다"고 했다. 아주 잘 치면 1타, 아니면 순식간에 2타까지 까먹을 수 있는 위기였다.
다행히 공 밑에 스프링클러가, 무벌타 드롭을 하기 위해 스탠스를 잡았는데 그 곳에 또 스프링클러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탈출이 쉬운 지점을 확보했고, 파 세이브에 성공했다. "신이 내 곁에서 도와주고 있는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며 "실제 다음 홀에서 이글을 잡아 역전의 동력을 마련했고, 16번홀에서는 우승에 쐐기를 박는 버디를 잡았다"고 소개했다.
▲ "따뜻한 인비씨"= 별명이 '침묵의 암살자'다. 필드에서는 무표정에서 출발하는 카리스마가 철철 넘친다. 일상에서는 그러나 누구보다 정이 많다. 4일 오전 귀국하자마자 17년 동안 기른 반려견 '쎄미'를 보기 위해 제주도가 아닌 경기도 수지 성북동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첫 우승 당시 아버지 박건규씨가 선물한 검정색 진도개-코커스페니얼 믹스견이다.
"(브리티시여자오픈) 대회 기간 발작을 일으켰다는데 내가 걱정할까봐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는 박인비는 "5개월이나 못 봤는데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준 것 같다"며 "강아지라기보다는 가족"이라고 표현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쎄미'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음 주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포틀랜드클래식 출전까지 포기했다.
▲ "퍼팅은 자신감"= 주 무기는 여전히 '짠물 퍼팅'이다. '커리어 그랜드슬램' 역시 퍼팅의 힘이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모델은 오디세이 화이트 핫 투볼 퍼터다. 남편 남기협씨가 강력하게 추천했고, 지난 4월 노스텍사스슛아웃에서 선택해 곧바로 그 대회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이후 퍼팅이 말썽을 부렸다. 다시 교체를 할까 고민하던 순간 "이 퍼터가 너에게 딱 맞는다. 역사를 새롭게 쓸 것"이라고 말한 남편이 떠올랐다. "브리티시여자오픈 최종일에는 최근 2년 사이 가장 신들린 퍼팅이 나왔다"는 박인비는 "셋업을 하면 무조건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며 "운좋게 마지막 날 느낌이 왔고, 그래서 긴장도 안 됐다"고 했다.
▲ "가족, 또 가족"= 세계랭킹 1위를 지키는 힘이다. "가족이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나갈 필요가 있을까 생각한다"는 박인비는 "이번 우승도 부모님과 남편 등 가족들이 가장 큰 도움이 됐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골프 유학을 떠나 LPGA 2부 투어를 뛸 때는 아버지가 직접 캐디백을 메기도 했다.
2008년 US여자오픈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 뒤 4년 동안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다. 은퇴를 고민하던 시점에 부모님과 남편이 다시 희망을 줬다. "남편을 만나 마음을 바꿨고, 부모님은 남편과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투어를 함께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고 설명했다. 남씨는 특히 억지로 오른손을 덮었던 릴리스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등 박인비 스윙을 완성시키는 코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 "올림픽, 그리고 명예의 전당"= 최근 미국 언론들은 "5개 메이저 타이틀을 모두 가져가야 진정한 커리어 그랜드슬램"이라고 시비를 걸고 있다. "에비앙챔피언십은 메이저로 승격하지 1년 전인 2012년 이미 우승해 욕심이 없다"는 박인비는 "그렇다면 레전드들은 다시 에비앙에서 우승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며 "외국 선수의 대기록에 대한 시샘"으로 일축했다.
목표는 따로 있다. 먼저 내년 리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 그 다음에는 세계골프 명예의 전당과 LPGA투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다. "지금까지 명예의 전당을 언급한 적은 없지만 내 골프인생의 마지막 목표"라며 "내 이름을 골프 역사에 길이 남기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를 내비쳤다.
제주=노우래 기자 golfman@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