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학 서울대 행정연구소 특별연구원
학교나 사회생활 중에 외래어를 접하게 되면 그렇구나 하다가도 다른 맥락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의미에 막히기도 한다. '스놉'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사전에서는 속물이라 하므로 성인이나 귀인에 대비시켜 출신이든 행태가 천하다는 의미로 해석해서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에서 말하는 스놉효과(snob effect)에 이르면 의아해진다. 이 용어는 남들 사는 건 안 사고 구입하기 어려운 상품을 구입해 과시하고 싶어 하는 소비행태를 뜻하니 말이다. 이러한 의도가 고상하다고는 못해도 굳이 속물이라고까지 할 것은 없지 않은가. 많은 경우 단어의 어원에서 궁금증이 풀리는데 스놉도 그렇다. 그 배경은 영국에서 귀족만 교육의 혜택을 받다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신흥 부르주아지도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나타난 해프닝이다. 몇 가지 설명이 있지만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이 유력하다. 이 학교에서는 귀족인 학생 가문의 작위를 학생부에 부기하여왔는데 이제 작위가 없는 평민들이 들어오게 되었으니 그에 맞추어 작위 없음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영어로 without nobility에 해당하는 라틴어 sine nobilitate를 약어로 s.nob.이라 한 데서 'snob'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갑자기 부를 쥐게 된 입장에서는 그 부를 가지고 같은 신분의 평민들과 자신을 차별하려는 심리와 다른 한편 귀족이 이를 멸시하려는 심리가 자연히 병존했으리라. 이렇게 보면 자신을 남과 다르게 구분 짓고 싶어 하는 소비행태, 즉 스놉효과와 이러한 지위와 행태를 낮추어 부르는 스놉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졸부가 더 높은 신분에 가까워지려는 욕망을 갖고 지위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처세는,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룬 우리나라에서 늘상 볼 수 있는 모습일뿐더러, 사실 인지상정이다. 오 헨리 단편 중에 '신사를 만드는 데에 삼대가 걸린다'는 말이 나온다. 물론 졸부로서는 이를 좀 더 빨리, 좀 더 확실히 이루고 싶으리라. 그 소설에서는 결혼을 계기로 삼기 때문에 극적이기는 하지만 통상은 파티, 실내장식, 문화소비와 같이 다방면에 걸쳐 행태개조를 하려한다. 실리콘밸리의 정보기술(IT)붐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이러한 교육을 전담하는 회사도 있었단다. 그중에 한 부류가 와인스놉이다. 이 와인은 어느 지방에서 어떻게 생산되어 어떤 등급인데 향취가 어떠하며 뒷맛이 또 무슨 와인하고 비교해서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와인의 가격이 터무니없고, 적도를 지나는 길고 긴 운반과정에서 품질이 치명적으로 저하됨에도 불구하고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그래도 이 와인스노버리는 그만큼의 비용을 치러야 하고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문화주도적이라는 점에서 상류사회에 (거의) 안착했다는 선언에 가깝다. 한국 경제에 거품이 꺼지면서 예전같이 와인스놉을 보기가 쉽지 않다. 시원섭섭하다. 요즘 뉴스를 채우고 있는 성완종씨의 사무실에서 나온 유품이 화제다. 동전 모으는 저금통과 저가의 신변잡화나 양복. 보통의 경우라면 검소한 생활습관과 청렴한 처세의 상징이련만 그런 얘기는 없다. 돈이 사회에 접근하는 유일한 통로라고 믿고, 돈뭉치를 들이대면 세상일 모두 다 풀린다고 여긴 사람이라서일까. 하지만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다.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보면 역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실감은 하지만, 돈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은 많다. 사람냄새가 나는 만남과 어줍지 않지만 고집하려는 한 줌의 문화가 그렇다. 그러한 사무실에서 와인이 나오고, 오페라 관람을 위한 입장권이 나오고, 사람과 사회에 접근하는 통로를 좀 더 다양하게 확보했다면 달라졌을까? 그의 운명 말고 우리 사회의 질 말이다. 김환학 서울대 행정연구소 특별연구원<ⓒ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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