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앤비전]미생과 지상파TV

최성범 우석대 신문방송학 교수

세계적인 미디어기업인 타임워너 그룹의 자회사 중에 HBO(Home Box Office)라는 프리미엄 영화채널이 있다. 1972년도에 설립돼 주로 최신 할리우드 영화나 권투경기를 방영하는 뉴욕의 유료방송으로 시작했지만 이젠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영화 채널로 거듭났다. HBO를 시청하려면 추가 수신료를 내야 하지만 2013년 8월 말 현재 미국 내 가시청 가구는 3244만가구에 달하며 전 세계 151개국에서 서비스를 제공한다.이 채널이 만드는 프로그램들은 명성이 드높다. '래리샌더스쇼' '섹스앤더시티' '더소프라노' '식스피트언더' '보드워크 엠파이어' '왕좌의 게임' '트루블러드' '트루디텍티브' '뉴스룸' 등 공전의 인기를 누린 프로그램들을 제작했다. 재미만 있는 게 아니라 작품성도 갖춰 거의 매년 에미상과 골든그래미상을 독식하고 있다. 'TV가 아닙니다. HBO입니다(It's not TV. It is HBO)'라는 슬로건은 이 채널의 위상과 자존심을 말해준다. 창의성과 전략적 비전을 조화시켰다는 점에서 방송의 갈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4년 한국의 방송계의 판을 뒤흔든 드라마는 케이블 방송 tvN이 제작한 '미생'이었다. 지상파 드라마가 연애타령, 막장, 그리고 판타지에 매몰돼 있는 동안 미생은 현실을 사는 현대인들의 고단한 삶을 리얼하게 그려내면서도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아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뿐 아니라 비정규직 문제에 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도 됐다. 시청률도 10%에 육박해 지상파의 몰락과 케이블의 약진이라는 방송산업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케이블방송의 성장세는 몇몇 프로그램에 그치지 않는다. 드라마, 예능, 그리고 일반 토론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구체적으로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한국의 지상파TV에서 미생 같은 드라마 제작이 가능할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많다. 유명스타와 자극적인 스토리, 간접광고를 위한 화려한 세트와 의상으로 대변되는 한국 드라마의 틀이 이미 고정돼 창의성이 들어갈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지상파들은 어떤 면에서 대기업병에 걸린 셈이다. 사실 지상파의 몰락과 케이블의 부상은 이미 예견된 바 있다. 1995년 케이블 방송이 처음 시작된 이후 지상파는 끊임없이 케이블방송 그리고 인터넷과 모바일의 도전을 받아 왔다. 그 결과 지상파TV의 시청시간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2014년 지상파방송광고는 전년 대비 3.5% 줄어든 반면 케이블채널은 4.8%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TV는 이제 과거 신문이 걸었던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다. 방송선진국 미국의 경우 TV가 디지털(인터넷과 모바일)에 밀리는 추세가 뚜렷하다. 2012년을 기점으로 이용시간에서 TV가 디지털미디어에 역전당했고, 2014년 현재 TV는 37%로 디지털의 49%에 비해 그 격차가 많이 벌어졌다. 케이블 고객의 26%가 인터넷연결만을 원한다는 조사도 있다. 게다가 지난해 24세 이하 가입자는 무려 71%나 감소했다. 대신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인 넷플릭스에 가입하는 게 추세다. 디지털시대의 도래와 플랫폼의 다양화라는 거대 추세 앞에서 지상파TV가 과거의 위상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지상파TV들의 위기 대응 방식이 과거 거대 신문사들이 했던 방식과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점. 자기혁신을 게을리 한 채 세 과시에 나서는 것이다. 우선 신문들과 케이블방송사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광고총량제를 강행할 태세다. 또한 정기뉴스 시간을 통해 700메가 주파수 할당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한편 재송신료 인상을 둘러싸고 디지털방송협회 탈퇴라는 강수를 뒀다. 또한 유튜브에 콘텐츠 공급을 중단했다. 모든 현안에 대해 초강수로 일관하는 것이다. 지상파의 위기는 디지털로 대표되는 거대 트렌드가 일차적인 원인이지만 독과점체제와 아날로그 시대에 길들여진 사고방식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대형 방송사에서 미생 같은 드라마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를 내부조직과 문화에서 한번 찾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최성범 우석대 신문방송학 교수<ⓒ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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