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거액 인출사건, 수상한 거래 잡아낼 '탐지시스템'도 없었다

은행권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 미적이는 동안 고객 피해만

[아시아경제 이장현 기자] 농협 통장에서 거액의 돈이 유출됐다는 피해사례가 수십 건 알려지면서 일부 고객이 농협 계좌에 넣어둔 돈을 모두 인출하는 소란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피해자들이 당한 패턴이 단순해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 Fraud Detection System)을 구축하지 않은 농협의 안일한 보안 의식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26일 금융권에 따르면 NH농협은행과 농협상호금융은 현재까지 평소 이용자의 금융거래 이용 패턴과 거래내용, IP주소, 단말기 정보 등을 분석해 수상한 거래를 감지하는 FDS를 구축하지 않았다. 농협은 올 연말까지 최고 수준의 고도화된 FDS를 구축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금융감독원이 제시한 마지노선에 맞춰 느긋하게 준비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시중은행이 지난해부터 이미 FDS를 구축한 것과 비교된다.지난 6월 전남의 한 50대 주부의 농협상호금융 통장에서 텔레뱅킹으로 1억2000만원이 빠져나간 사고의 경우 이 돈이 사흘 간 41차례 걸쳐 300여만원 씩 대포통장으로 흘러들어갔다. 농협은 이렇게 수상한 거래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특히 이 돈이 밤 11시부터 단기간 내 일정액씩 빠져나갔다는 점에서 FDS가 있었다면 충분히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한 금융보안 전문가는 "텔레뱅킹은 현재까지 알려진 해킹 수법이 모두 막혀 있어 고객과실로 생각되지만, 단기간 내 비슷한 액수가 빠져나갔다는 점에서 FDS로 걸러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시중은행 보안부서 관계자도 "50대 주부의 통장에서 밤늦게 수십 번의 거래가 일어나 억대의 돈이 빠져나간 것은 FDS가 있었다면 이상거래로 판단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FDS가 구축된 시중은행의 경우 이런 이상거래가 탐지되면 고객에게 확인 연락을 하고 거래정지, 지급정지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게 된다.실제로 FDS가 아직 고도화되지 않은 농협은행도 수상한 거래를 쉽게 걸러낸 사례가 있다. 지난 7월 보이스 피싱에 속아 자동화기기를 통해 나흘간 약 200만원씩, 36차례에 걸쳐 8000만원을 송금한 농협은행 A씨의 경우 은행이 이상거래를 파악하고 지급정지 조치를 취했던 것. 반면 텔레뱅킹으로 돈이 빠져나간 전남 광양 사례에서 농협상호금융은 수상한 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때문에 농협상호금융의 텔레뱅킹 보안 수준이 특히 낮은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그동안 금융감독원은 은행권에 꾸준히 FDS 구축을 요구해왔다. 지난 4월 최수현 당시 금감원장은 농협은행을 포함한 주요 은행장들을 불러 모아 FDS의 조속한 도입을 주문했다. 금감원의 요구에도 밋밋한 반응을 보인 은행들은 10월 국감에서 질타를 받았다. 김기준 국회 정무위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은행권에서 FDS를 도입한 은행은 극히 일부"라면서 "최근 인터넷이나 전화를 이용한 금융사기는 날로 지능화되는데 나머지 은행들은 아직 FDS를 구축 중이거나 계획만 세우고 있어서 적극적인 금융사고 방지노력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당시 금감원도 연말까지 FDS 구축을 서두르라는 내용의 공문을 각 은행에 보냈었다.농협통장에서 대포통장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들은 농협에 보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농협은 은행 과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며 난감해하고 있다. 농협 관계자는 "경찰의 보강 수사가 진행 중인 만큼 결과를 기다려보겠다"고 말했다.이준길 미국변호사는 "비슷한 사고가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는데 은행이 자신들의 잘못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피해자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소비자 보호라는 금융사의 의무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선 보상 후 조사에 착수하는 제도적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금융감독원은 광양지역 농협 1억2000만원 인출 피해 건과 관련해 경찰청 사이버 수사대와 공조해 조만간 검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기초적인 정황을 파악 후 소비자 과실이 있었는지 은행 전산 상 문제가 있었는지 면밀히 들여다볼 예정"이라고 밝혔다.이장현 기자 inside@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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