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지연진 기자]"우리는 은연중에 '남자가 우선'이라는 세뇌를 받았어요. 문제는 그런 세뇌를 받고도 세뇌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죠" 백현욱 한국여자의사회 국제이사는 여성 네트워크에 적극적이다. 여성들이 경험을 공유하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때 '유리천장'도 깨진다고 믿는다. 한국여자의사회에서 국제이사를 맡아 글로벌 여성 인맥을 연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남녀의 역할이 공공연하게 자리매김한 사회에선 여성들의 '각성'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교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백 이사는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이고 있다. 세계여자이사회의 학술위원장을 지내며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세계여자의사회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여성가족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여자의사회의 멘토링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서울대 여의사 모임인 함춘여의사회를 이끌며 여자 선후배간 끈끈한 정을 맺어주고 있다.
백현욱 한국여의사회 국제의사
◆女, 스스로 벽에 가두다 = 백 이사는 어릴 적부터 여성에게 불리한 세상을 알아챘다. 6.25전쟁 직후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태어난 그는 경제적인 면에서 여성이라 더욱 억울한 인생을 목도했다. '나중에 크면 꼭 자립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공부를 '매우' 잘하는 여고생이 이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법조인이나 의료인. 실수로 억울한 사람을 만들 수 있는 법조계와 달리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직업에 가산점을 줬다. 그리고 서울대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의대 시절은 순조로웠다. 의대 생활은 물론 산악반과 연극반 활동에도 재미를 붙이고 열심이었다. "당신은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는데 산악부장이나 연극반장을 왜 안했어?" 의대를 졸업한 뒤 남편이 물었을 때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동했지만 그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한 탓이다. "흥미로웠어요. 그런 건 남자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레지던트로 남을 때에도 '여자인데도 남겨줘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죠. 여자가 대학교수로 의대에 남는 것은 넘보지도 못할 일이었어요. 제가 선택하고 싶으면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스스로 벽에 가둔 겁니다" 남녀의 역할 모델이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힌 나머지 여성의 한계를 스스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사회 전반에 걸쳐 남녀차별은 존재했다. 백 이사는 사회 첫 관문부터 차별의 벽에 부딪혔다. 서울의대 졸업 당시 이례적으로 여자 동기들이 많았다. 여의사를 한두 명 배출하기도 어렵던 1980년대 10명의 졸업생이 나왔다. 레지던트 경쟁은 치열했다. 그러자 여학생끼리 경쟁을 시켰다. 남학생의 경쟁률을 줄여주기 위해서다. 백 이사는 여자 동기들과 여자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학교의 부당함을 알렸다. 결국 여대생 모두 레지던트로 남게됐다. 하지만 레지던트가 끝나고 전공과목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의사를 거부한 학과도 있었다. 그는 "남자들과 정식으로 경쟁하면 여자들이 훨씬 우수하지만 공정한 경쟁을 안시켜주겠다는 것"이라며 "그 땐 이유도 없이 거부당해도 어쩔수 없었다"고 털어놨다.◆일과 가사 모두 '내 몫' = 그래도 치열하게 살았다. 졸업 후 100병상(환자 침대가 100개인 병원)의 중소병원에서 하루 최소 100명, 많을 때는 200명의 환자까지 봤다. 화장실도 포기하고, 점심시간 15분을 제외하고 꼬박 환자를 봤다. 진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시댁 식구들과 아이들이 기다렸다. 저녁식사 준비부터 뒷정리까지 그녀의 몫인 것이다. 남편이 유학을 떠난 7년간 그는 홀로 아이 둘에 시부모님을 모시고 지냈다. "제가 운이 좋았어요. 시부모님이 아이 둘을 모두 키워주셨거든요. 그렇지 않았다면 육아 때문에 일을 못했을 수도 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시부모님께 감사한 마음뿐이이다. 하지만 그 때로 돌아가면 인생은 '고단 그 자체'였다. 백 이사는 "휴일이 가장 힘들었을 정도"라면서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았는데 나중에 미국 가서 애들하고만 지내니까 살림은 참 쉽더라구요"라고 말했다.나이 마흔. 백 이사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고등학생인 딸과 초등학생인 아들만 데리고 떠났다. 미국 보스턴의 터쉬(Tufts) 대학내 미국 농무성 소속 노화영양연구센터에서 3년6개월을 지냈다. "앞으로 25년을 더 활동해야 하는데 의료지식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어어요. 또 그동안의 삶이 가족과 환자를 위해 살아온 만큼 처음으로 '나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아이 둘을 교육시키며 공부를 하는 것은 녹녹치 않았다. 귀가 시간이 제각각인 아이들을 픽업해 저녁을 먹인 뒤 다시 연구소로 향했다. 밤새 실험을 한 다음날 아침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등교시키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그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나 싶다"면서 "하지만 제가 노인영양을 선택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 ◆커리어가 쌓일수록 높아지는 '유리천장' = "여성들은 직장생활 초반에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 업무 자체에만 중점을 둡니다. 하지만 경력이 쌓일수록 견제가 많이 들어 옵니다"여성의 경우 사내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윗사람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승진하는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방법 등에 서툴다는 것이다. 업무에만 열중하는 점이 여성의 장점이지만, 연차가 올라갈수록 '실력'만으로는 승진하기 어렵다. 인간관계에서 전략이 없는 점이 유리천장인 것이다.백 이사는 "후배 여성들은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능력도 필요하다"면서 "무조건 일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업무를 인정받을 수 있는 전략도 배워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또 후배 여의사들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은 없다"고 강조한다.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며 당당하게 도전하고, 평등하게 경쟁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새기라는 것이다. 그는 또 "유리천장은 자라나는 세대가 깰 수 없다"면서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기성세대가 할 일이 무엇인지 찾는 것은 우리 세대의 의무"라고 힘주어 말했다. 제도적 개선도 필요하다. 자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놀라서 쀮아가는 사람은 아직까지 엄마다. 그는 "후배 세대는 육아 문제를 국가적으로 풀어야 한다"면서 "아빠의 생각이 바뀌도록 제도적으로로 뒷받침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누구나 늙는다 = 소화기내과를 전공한 백 이사가 노인영양을 공부한 것은 노인질환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친정부모님과 시부모님이 하나 둘씩 아프기 시작하면서 병원신세를 지는 날들이 많았다. 인구고령화로 노인인구를 갈수록 증가하는데 노인에 대한 전문적인 치료는 전무했다. 당시만해도 영양소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개념인 '영양테라피'는 생소한 분야였다.노인영양은 백 이사의 최대 무기가 됐다. 2012년부터 병원 전체의 영양을 다루는 한국정맥경장영양학회을 맡아 이끌고 있다. 분당제생병원에서 올해 1월1일 개설한 국내 최초의 임상영양내과도 책임지고 있다. 미국과 일본에서 노인영양을 공부한 만큼 그가 적임자인 것이다. 노령화로 식사를 거르면서 몸져누운 어르신과 말기 암환자들이 주로 찾아온다. "노인에게 영양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부족한 영양소를 체크해 보충해주면 누워있던 사람이 앉아서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갑니다. 저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회복 속도가 좋아 오히려 환자에게 감사해하고 있어요"백 이사는 앞으로 '영양테라피'를 확산시키는 것이 목표다. 병원영양시스템이 없는 중소병원이나 요양시설에 노인에 대한 영양테라피의 표준을 만들어 보급하는 것이다. 지연진 기자 gyj@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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