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이와 소연이 사이에서 갈팡질팡 거리는 마음의 행로는 하림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고 있었다. 혜경이야 자기 말대로 다 이해한다 쳐도, 그렇다고 소연이에 대한 마음에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하림이 선택하고 자시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소연이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나가는 버스에 손을 흔들었다고 다 세워주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었다. 그건 운전수 마음이 아닌가.그러니까 어쩌면 혜경이에 대해서도, 소연이에 대해서도, 하림이 저 혼자 김치국 마시며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요즘 젊은 아이들은 쿨한 것을 좋아한다지 않은가. 그런 쓸모없는 생각을 하며 거의 화실에 가까이 갔을 무렵, 과수원에서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 이장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그날 바람 부는 밤, 저수지에서 헤어진 후 처음이었다. 하림은 할 일 없는 몽상에서 확 깨어난 느낌이었다. 될 수 있는 한 그가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하림은 약간 돌아서 발걸음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그러나 순간, 깨금발을 딛고서 높은 가지 쪽을 다듬고 있던 이장의 눈길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어딜 다녀오는 길이오?” 이장이 먼저 말을 걸었다. 하얀 목장갑 낀 손에 전지가위가 들려있었다.“아, 안녕하세요! 길목 슈퍼에 갔다가.....” 도둑질하다 들킨 놈처럼 하림이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수관 선생의 황토집에 갔던 이야기는 빼놓았다. 괜히 이층집 여자 남경희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나올까봐 지레 빼놓았던 것이다.“아, 일일구에 실려 갔던 이야기는 들었수만.....병원에 갔다 오는 길이오?”“아니요. 보호자로 소연인가 하는 애가 따라갔고, 저는 그냥 산책 중이예요.”“그랬군. 그나저나 전날 밤, 미안하게 됐수다.” “아뇨. 잘 기억도 나지 않는걸요.” 하림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하나마나한 맹물 같은 몇 마디를 나누고 나자 두 사람은 곧 헤어졌다. 운학은 다시 깨금발을 딛고 서서 높은 가지 쪽을 치기 시작했고, 하림은 가던 발걸음을 계속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사람들 같았다.하지만 그와 헤어지고나자 하림의 가슴에 일말의 불안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 불안의 정체를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불안은 여름날 일어나는 소나기 구름처럼 어둡게 하림의 가슴을 뒤덮기 시작했고, 화실 현관 문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슴 속에 맴돌고 있던 불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까 남경희로부터 들었던 ‘경로잔치’ 라는 단어였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송사장이란 작자가 곧 마을 노인네들을 위한 경로잔치를 벌일 거라고 해요. 마을 어른들을 꾀어 여론을 자기네들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려고 하는 수작이죠.’경로잔치.... 거기엔 무언가 불길한 냄새 같은 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장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그 단어가 떠올랐는지 모른다. 어쩌면 거기에서 아직 한번도 보지 못했던 송사장이란 작자의 얼굴을 거기서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거기에서 개를 쏘아 죽인 사건도 일부 드러날지도 모른다. 다가올 폭풍우를 알리는 검은 구름이 ‘경로잔치’라는 말과 함께 천천히 날개를 펴고 하림의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김영현 기자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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