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 - 5장 저수지에서 만난 여인 (87)

하림은 다시 발걸음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저수지는 여전히 푸른 비늘을 반짝이며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었고, 물오리는 긴 자취를 남기며 유유히 짝을 지어 헤엄치고 있었다. 양지 쪽 고인 물에서 갓 깨어난 맹꽁이들이 우는 소리도 들렸다. 참새 떼들이 하늘에 송사리를 풀어놓은 것처럼 화르르르 날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아까 마주쳤던 예의 그 까만 옷 여자와 다시 마주칠까, 하고 희망 반 기대 반 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도중에 다른 길로 새버렸거나 아니면 동네 쪽으로 난 길로 가버렸는지 몰랐다. 그런데 하림이 집으로 돌아와 마당으로 들어서자 누군가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누구지?’하림은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마당에서 화실 창문 너머로 기웃거리다가 하림이 들어오자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몸집이 작고 이마가 유난히 불거져 나온, 무언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눈빛의 할머니였다. 그녀는 하림의 인기척에 몹시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비어있던 집에 누가 왔다 하길래......누군가 하고 지나가는 길에 한번 들렀구만요.”하고 황급한 어조로 변명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하림은 그제야 안심하고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담으며,“괜찮아요, 할머니. 둘러보세요. 사실 저도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암 것도 몰라요.”그러면서 현관문까지 활짝 열어 젖혀 주었다. 들어가서 볼테면 보라는 뜻이었다.“아, 됐슈. 그란디 우리 재영이랑은 어떻게 되남유?”할머니는 손을 젖는 한편 하림을 의심스런 눈으로 살펴보며 말했다.“윤재영씨 말인가요?”“음. 윤재영이....”“아, 할머니도 아세요? 윤재영씨랑 저랑은 친구예요. 아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하림이 약간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얼렁뚱땅 어림으로 말했다. 그러자 이마가 유난히 툭 튀어나온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난 재영이 고모 되는 사람이라우.”“예.....?”하림은 순간 깜짝 놀랐다. 설마하니 윤여사의 고모할머니가 이렇게 나타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보니 윤여사와 조금 닮은 면이 없지 않았다. “아, 그렇군요.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한번 찾아가 뵐까 하던 참이었는데 잘 됐네요. 윤여사, 아니 윤재영씨가 고모님 꼭 한번 찾아뵈라고 저에게 부탁을 했었거든요. 그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세요.”하림이 반갑게 이야기하다 말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손사래를 치며 할머니가 말했다.“관둬요. 날도 춥지 않은데.... 뭐. 신경 쓸 거 없다오. 여기 잠깐 있다 가면 되지.”그러면서 아까 이장이 앉았다 갔던 부셔진 의자 쪽으로 가서,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등받이에다 기대놓고 엉덩이를 걸치며 끙, 하고 신음소리를 내었다.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김영현 기자 ⓒ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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