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가 마음에 걸리지만 얼마 전 걔네 고모를 만났더니 자기가 데리고 있음 안 되겠느냐고 하더라. 시집도 안가고 혼자 살고 있거든. 은하도 자기 고몰 잘 따르고....”“너 정말 해보려구.....?”하림이 혜경 쪽으로 돌아누우며 말했다.“응. 왜? 안 돼?”“아니야. 그냥.”하림이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혜경의 숨결이 가슴께에 닿았다.“부러워서......너의 그런 용기가.”“풋.”혜경이 가볍게 웃었다.진심이었다. 하림은 여전히 문학소녀 같이 변하지 않는 그녀의 무모한 용기가 부러웠다. 어쩌면 그런 무모한 용기가 낯선 세상에 처음 발을 딛게 하는 힘인지도 몰랐다. 일찍이 시인 박인환이 몰래 무역선을 타고 미국으로 밀항한 전설 같은 이야기처럼.... 그녀가 예전에 하림이 아니라 건달 같은 태수 선배에 끌렸던 것도 그런 기질 때문인지도 몰랐다.하림의 그런 생각이 통했는지 혜경이 손가락 끝으로 하림의 등에 가만히 낙서를 하며 말했다.“너, 은하 아빠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태수 선배.....?”“응. 곱슬머리 짱. 그땐 너 뿐만 아니라 다들 싫어했지. 건달이었으니까.” 하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문득 그녀에게 그의 그림자가 느껴졌다.“나도 알아. 하지만 그이에겐 그이만의 세계가 있었어.”혜경이 태수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하림도, 혜경도 그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약속이나 한 듯 금기시해왔다. 서로가 상처를 건드리는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본 것, 자기가 기억한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더 이상 알려고 하지도 않고..... 나도 그이가 문제가 많았던 인간이란 건 알아. 하지만 내가 그이랑 결혼한 건 그냥 그이가 막무가내였거나 내가 철이 없어서 저지른 일만은 아니었어. 솔직히 말해 그인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많았어. 흔히들 아웃사이드라 불리는 그런 류의 사람들처럼 말이야.”하림은 묵묵히 혜경의 말을 듣고 있었다. 혜경은 그동안 가슴에 담아두고서 하지 못했던 말을 꺼내는 사람처럼 이어서 말했다.“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 이 세상의 질서에 튜닝되기 싫어 거짓 위악을 저지르는 인간들 말이야. 알고 보면 한없이 약하고 여린데도 불구하고, 겉으론 마치 악의 화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껄떡거리고 다니는 사람들.... 학교에선 문제아라 불리고 사회에선 비적응자, 낙오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말이야. 은하 아빠도 어쩌면 그런 사람이었는지 몰라.”혜경의 목소리가 젖었다. 하림은 왠지 모르게 복잡한 감정이 되어 팔베개를 한 채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귀에 질주하는 오토바이의 폭발음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다. 사실 하림이 태수 선배를 안다고 했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겨우 스쳐지나간 어릴 적 인상 몇 가지만으로 평생 그를 재단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스무고개를 넘는 것과 같다고 한 옛말이 떠올랐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도 되고, 사람이란 그만큼 복잡한 동물이라는 뜻도 될 것이다.“그이는 전자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어했어. 쾅쾅거리는 록을 좋아했지. 한동안 선배들이 하는 밴드를 따라 다니기도 했으니까. 나중엔 음악주점에서 기타를 치기도 했어. 거기서 만난 주먹 세계 건달들을 형이라 부르며 쫓아다니기도 했고.... 나중에 그들에게 이용을 당해 재산까지 홀랑 다 날려 먹어버렸었지만....”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김영현 기자 ⓒ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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