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 2장 혜경이 43

자면서 꿈을 꾸었다. 야자수가 있고, 코끼리가 있고, 뒤로 넓은 바다가 있었다. 자기 전에 보았던 미장원 벽의 액자 그림 그대로였다. 그 위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바람이 조용하게 불어왔고, 흰 모래톱 위로 햇빛이 투명하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 그 자체였다. 평화 속으로 작은 배가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배 안에는 긴 머리의 여자가 타고 있었다. 그녀의 목에는 빨간 부겐벨리아 꽃목걸이가 걸려있었다. 그런데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여자의 모습을 보니 해골이었다. 깜짝 놀란 하림은 급히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평화롭던 풍경은 사라지고, 바람이 거세게 불고 파도가 쳤다. 그래도 햇빛은 쨍쨍하여 마치 모든 풍경이 진공 유리병 속에 들어있는 것 같이 보였다. 하림이 무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벙어리처럼 소리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너, 꿈꿨구나!”혜경이 목소리였다. “응.”하림은 눈을 뜨고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벽에는 여전히 야자수가 있고, 코끼리가 있고, 뒤로 넓은 바다가 있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혜경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림의 옆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깼어?”“응.”“피곤했나보구나. 코까지 골던 걸.”“그런가.”하림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앉았다.“커피 마실래?”“응.”혜경이 일어나서 커피포트에 물을 받으러 나갔다. 개꿈.... 개꿈은 어릴 적에나 꾼다는데... 하림은 멍한 표정으로 앉아 가볍게 실소를 터뜨렸다. 어디선가 아득하게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밤의 음악 편지 운운 하는 걸 보니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 같았다. 혜경이 커피포트에 물을 받아서 들어왔다. 하림은 다시 팔베개를 하고 누워 그녀의 움직임을 눈으로 쫒았다. “몇 시니?”“아직 얼마 안됐어. 열두시.”“열두시? 그럼 한시간께나 잤구나.”“응.”혜경은 다시 무언가를 가지러 나갔다가 곧 돌아왔다. 혜경이가 움직일 때마다 미세한 바람이 일었고, 미소한 바람결에 혜경의 냄새가 났다. 재작년 가을, 초등학교 동창회 때 생각이 났다. 은행나무 밑으로 뛰어가던 혜경의 그림자에서도 그런 냄새가 났다. 어린 시절 엄마의 치마폭에 폭 안기면 맡아지던 바로 그 냄새였다. 하림은 이제야 그 냄새의 이름을 알 것 같았다. 그리움.... 그래. 그리움이란 이름의 냄새였다. “오늘 나, 옛날 애인 만났다.”하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혜경이 건네 준 커피를 받으면서 말했다.“그래? 좋았겠네?” 혜경이 자기 커피를 들고 하림의 곁에 앉으면서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다음 달에 결혼한대.”“허어, 그래서 잠꼬대까지 했구나!”혜경이 웃으면서 놀리듯이 말했다. 볼우물이 예쁘게 패였다. “출판사에서 만화 기획하는데 그래서 만화가랑 한 대. 꽁지머리에 좀 멍청하게 생긴 친구랑.”“여자는 똑똑한 남자보담 좀 멍청한 남자를 더 좋아해.”혜경이 돌아보며 말했다.“나도 알고 보면 멍청한데....?”하림의 말에 혜경이 크크거리며 웃었다. “넌 멍청한 게 아니고 바보지. 바보!”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오진희 기자 valer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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