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호기자
정재훈사진기자
[사진=임중용(왼쪽)과 크라프트 코치(오른쪽)]
그렇다곤 해도 브레멘에 들어가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공교롭게도 그 때 브레멘 1군이 전지훈련을 떠날 때였다. 그래서 크라프트 코치님이 토마스 볼프 2군 감독을 소개시켜 주셨다. 사실 첫 이미지는 안 좋았다. 독일 사람들이 사전 약속을 굉장히 중요시하지 않나. 구단 사무실로 볼프 감독을 찾아갔는데, 뭔가 연락이 잘못됐는지 약속이 안 돼 있던 거였다. 처음엔 뭐냐고 버럭 하더라. 내 통역이 여자 분이셨는데, 독일 남자들이 또 여자 부탁은 잘 거절 못하는 것 같다. (웃음) 그 분이 "크라프트 코치 제자가 한국에서 축구 유학을 왔다"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볼프 감독도 이내 화를 누그러뜨리고 굉장히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그리곤 곧바로 그 다음 주부터 훈련을 참관하라고 하셨다."지성이면 감천"생각보다 일이 잘 풀린 셈이지만, 그때도 정식 코치로 시작한 건 아니었나보다처음엔 참관 자격이었다. 당연히 구단 물품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래도 구색은 맞춰야겠다 싶어서 브레멘 팬샵에 가서 구단 트레이닝복과 비슷한 옷을 사 입었다. 막상 훈련장에 가보니 옷이 조금 달랐다. (웃음) 처음엔 2군 선수들과 같이 훈련도 하고 연습경기까지 뛰었다. 은퇴하고 운동을 거의 안했던 터라 죽겠더라. 열흘 정도 지나고 감독에게 "도저히 못하겠다. 난 여기 스터디, 공부하러 온 거다"라고 하니 웃으면서 일단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별수 있나. 그냥 있는 힘껏 했다. 항상 훈련장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훈련 시작하고 끝날 때 공도 나르고 물도 갖다 줬다. 감독 쫓아다니면서 장비도 나르고.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일부러 그런 것 같다는 느낌도 드는데맞다. 지켜본 거였다. 볼프 감독이 어느 날 갑자기 내게 미팅을 하자고 했다. 따라갔더니 내게 "그동안 이 곳에 너처럼 축구 공부하러 오는 사람은 많았지만, 단 한 명도 성실한 경우가 없었다"고 했다. 그리곤 "미스터 임은 배우려는 자세가 돼있다. 내일부터 정식으로 코치 수업을 받아라"고 말해줬다. 곧바로 구단 물품도 배급받았다. 제대로 맞춰 입으니까 더 이상 뻘줌하지도 않고(웃음), '이 사람들이 정말 나를 믿고 인정해주는구나'란 생각도 들어 뛸 듯이 기뻤다. 그 뒤론 술술 풀렸다. 단장과 토마스 샤프 1군 감독을 만났는데, 크라프트 제자라고 하니 잘 배우고 가라고 덕담을 건넨 뒤 정식 연수코치 자격을 부여했다. 샤프 감독이 13년 동안 브레멘에 있었는데, 공부하러 온 사람 중 이렇게 경기장이나 라커룸 출입까지 허락한 경우는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어찌 보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거다. 무슨 '인간극장'을 보는 기분이다. 독일은 원리원칙을 중요시하는 나라인데,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 코치진에 합류하게 되는 게 가능한가. 또 동양인이다 보니 텃세나 차별도 꽤 심했을 것 같은데아무리 그래도 거기도 사람 사는 동네니까. (웃음) 솔직히 처음엔 자존심도 많이 상하고 무시도 당했다. 2군 감독이 날 처음 소개할 때 다들 내가 선수로 온줄 알더라. 동양인은 얼굴만 봐선 나이를 잘 모르니까. 내가 38살이라고 하니 하나같이 놀랬다. 또 말은 안 통해도 상대방이 날 무시한다는 건 느낌으로 알 수 있지 않나. 2군 코치는 훈련할 때 내게 멀리 떨어진 공 주워오라고 명령조로 얘기하기도 했다.[사진=독일 연수를 마친 뒤 브레멘 U-23 팀과]
K리그와는 다른 독특한 훈련 프로그램은 없나대부분 비슷하다. 다만 경기 당일 준비 방식이 좀 다르다. 만약 저녁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한국 선수들은 아침에 가벼운 산책만 한 뒤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비축하는데, 브레멘은 오전에 나와 5대2 미니 게임을 하거나 스피드 훈련을 한다. 호기심이 생겨 물어봤다. 그러자 "한국에서 하는 방식도 좋지만, 이렇게 볼 감각도 찾고 선수들끼리 호흡을 맞출 필요도 있다"고 얘기하더라. 흥미로운 것은 프리킥 전담 키커는 예외란 점이다. 오전 훈련 내내 프리킥만 찬다. 그 선수는 그게 주 임무고 책임이니까. 같은 이유로 공격수는 슈팅 연습만, 측면 미드필더나 풀백은 크로스만 연습한다. 그런 점은 K리그도 적용하면 좋을 것 같다.부러웠던 독일의 축구 열기분데스리가 하면 전 세계 프로축구 가운데 가장 많은 관중수를 자랑하는 리그 아닌가. 실제로 열기가 얼마나 대단하던가가장 부러웠던 점이다. 독일 사람들은 정말 축구를 엄청나게 사랑한다. 말 그대로 남녀노소 모두가 축구에 열광한다. 경기 전날부터 축구장 주변은 교통 통제에 들어간다. 매 경기 만원 관중이 들어차고, 백화점과 마트의 대형TV는 늘 축구 중계를 틀어놓는다. 한 번은 경기장 맨 앞줄에 앉아 관전하다 뒤를 돌아봤는데, 관중석을 꽉 채운 모습이 정말 장관이더라. 압도적인 분위기였다. 도르트문트와의 홈경기 때는 원정 팬들이 관중석 절반을 노랗게 물들여버리기도 했다. 바이에른 뮌헨 경기는 암표만도 20만원이 넘는다. 그런 분위기다 보니 선수들은 몸 사리는 법도 없고, 더 신이 나서 뛰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K리그도 관중만 많아진다면 더 수준 높은 경기를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가장 흥행이 잘되는 리그인 만큼 마케팅 면에서도 본받을 만한 점이 많겠다연계 서비스가 좋다. 축구 입장권만 있으면 그날에 한해 버스나 기차는 모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브레멘은 물론 주변 니더작센 주(州)까지 적용되기 때문에 하노버나 볼프스부르크 같은 인근 지역으로 원정 응원가기도 좋다. 또 경기장 내 물품 반입이 금지된 대신, 일정 금액을 채운 전용 카드를 구입해 음식물이나 물품을 살 수 있다. 독일은 맥주가 유명하지 않나. 경기장 내에서 사용하는 맥주컵에도 일일이 감독과 선수들의 사진과 사인이 박혀있다.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선수단의 팬서비스 활동도 활발하겠다팬들과의 접촉점이 많다. K리그에선 보통 경기 다음날 가벼운 회복훈련을 하거나 휴식을 갖는데, 브레멘은 훈련장으로 나오라고 하더라. 갔더니 사이클 복장과 브레멘 엠블럼이 박힌 자전거를 나눠줬다. 브레멘 시는 강을 중심으로 자전거 도로가 굉장히 잘 정비돼있는데, 감독 이하 모든 선수들이 자전거를 타고 일렬로 도시를 한 바퀴 돈다. 50명이 그렇게 달리면서 지나가던 시민들과 인사하고, 중간 중간 사인도 해주고 사진도 찍는다. 몇몇 선수는 등에 장난스런 문구나 다음 홈경기 광고를 써 붙이기도 한다. 회복 훈련과 팬서비스를 동시에 하는 셈이다. 또 훈련장 수영장을 개방해서 선수들과 시민들이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단, 수영장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나도 한번 멋모르고 카메라 들었다가 혼난 적 있다.(웃음)"에두는 만냤나고?"갑자기 드는 궁금증이다. 짓궂은 질문 하나 하겠다. 혹시 에두는 만났나?뭘 또 그런 걸 묻나. (웃음) 아니다. 못 만났다. 샬케04에서 뛴다고 들었는데 독일 내 다른 팀으로 이적했더라. 현역 시절 자주 부딪혀서 악감정 남은 거 아니냔 얘기도 있던데, 전혀 아니다. 한국 떠날 땐 좋게 헤어졌다. 좋은 선수고 좋은 친구다. 독일에선 여전히 차범근이 가장 유명한 한국 선수라고 하던데 정말인가? 물론 차범근 감독님 인기와 명성은 아직 대단한데, 지금은 손흥민이 제일 인기 많다. (웃음) 함부르크 뿐 아니라 전국구 스타다. 구자철도 대부분 안다. 워낙 잘하지 않나. 이동국도 기억한다. 예전에 브레멘에서 뛰었을 때 잘했다고 하더라. 크라프트 코치님은 내가 처음 왔을 때 특정 한국 선수 이름을 거론하며 좀 알아봐 줄 수 있냐고 묻기도 하셨다. 독일 내에서 한국 선수들에 대한 이미지가 굉장히 좋다. 독일엔 일본 선수도 굉장히 많지 않나각 팀마다 일본 선수가 하나씩은 있다. 브레멘에도 유소년 팀에 일본 선수가 둘이나 있다. 다만 일본은 유명 스카우트를 통해 장기간 분데스리가 진출 창구를 개척했을 뿐이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한국 선수들이 일본 선수들보다 근성도 있고 독일 축구와 잘 맞는다. 길만 잘 열린다면 일본 이상의 성과를 낼 것이다. 개인적 생각으론 공격수보다 수비수들이 독일에서 더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그런 면에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다.반년이란 시간이 짧다면 짧은 기간인데, 참 많은 걸 배우고 얻은 듯하다아까도 말했지만 참 기막힌 인연이었다. 사실 후배 하나 믿고 무작정 독일로 넘어갈 땐 걱정도 많았다. 그런데 예전 스승과 우연히 재회하고, 또 분데스리가 명문팀에 들어가 정식으로 배우게 됐으니. 나를 믿고 보내준 인천에게도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됐다. 당초 1년 연수한 뒤 이후 계획을 논의할 예정이었는데, 얼마 전 인천 구단을 방문해 내 성과를 보여주니 만족해하며 1년 더 배우고 오도록 도와줬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귀국하기 전 샤프 감독님이 혹시 이번에 못 돌아오더라도 언제든지 환영할 테니 부담 없이 찾으라고 해주셨다. 감독님부터 브레멘 구단 관계자 모두 정말 잘해줘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사진=브레멘 1군 코칭스태프 및 선수들이 그에게 선물한 사인 유니폼]
나의 사랑, 인천 유나이티드인천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임중용 하면 인천, 인천하면 임중용 아니었나. 외로운 타지 생활 속에서 친정팀이 많이 그리웠을 것 같은데독일 갈 때 인천 구단 물품을 챙겨갔다. 한동안은 잘 때도 인천 트레이닝복 입고 잤을 정도다. (웃음) 경기장에 인천 엠블럼이 새겨진 점퍼를 걸치고 몇 번 갔는데, 독일 사람들이 처음 보는 팀이라며 어디냐고 묻더라. K리그에서 공부하러 왔다고 하면 다들 반가워했다. 그런데 같이 갔던 후배 놈은 AC밀란 점퍼를 입고 갔다가 봉변 좀 당했다. (웃음) 그래서 내 옷 하나 선물로 주고 왔다.독일에서도 인천 소식은 많이 접했나주로 SNS로 사진이나 경기 결과를 챙겨봤다. 브레멘 선수들은 어떻게 찾아봤는지 K리그 경기 다음날이면 내게 와서 '너희 팀 어제 1-2로 졌더라'고 놀리기도 했다. (웃음) 사실 올해 승강제가 신설된 터라 인천이 시즌 초 최하위로 떨어져 걱정도 많이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상궤도에 오를 거란 믿음은 있었다. 특히 이럴 땐 팀 내 고참의 역할이 중요한데, 인천엔 설기현, 김남일 같은 베테랑이 있지 않은가. 좀 다른 얘기지만 K리그도 이젠 장기적 안목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올해만 감독이 10명이나 바뀌었다. 유럽은 그 정도까지 단기간 성적에 얽매이지 않는다. 감독이나 선수든 한 번 믿었으면 꾸준히 신뢰를 주며 기다리는 맛이 있다. 임중용의 복귀를 기다리는 인천 팬이 많다나도 빨리 인천 팬들과 함께 하고 싶다. 안 그래도 귀국한 뒤 며칠 있다가 서포터즈 실무진을 만나 밥 한 끼 샀다. 사실 작년 은퇴할 때도 80명 정도 되는 서포터즈를 불러 당시 부단장님과 함께 식사 대접을 했다. 알려지는 건 싫었다. 괜히 생색낸다는 말 들을까봐 조심스럽더라. 그냥 정말 고마운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게 사람 사는 모습 아니겠나. 인천에 대한 애착이 참 남다르다. 지난해 은퇴할 땐 '인천 엠블렘이 내겐 곧 태극마크였다'란 말을 남기기도 했었다내가 태극마크를 단 적이 없어서 그렇다. (웃음) 농담이다. 인천에 와서 대표팀에서 뛰는 것만큼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말도 한 거다. 사실 운동 선수하면서 굴곡이 심했다. 인천유니폼을 입기 전에는 진지하게 선수 생활을 그만 두려고도 했다. 인천에 오면서 빛을 봤다. 인천에서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으니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독일에 인천 옷 가져간 것도 다 그런 이유다. 선수가 한 팀에서 오래 뛰고, 팀은 그를 레전드로 예우해주고, 팬들은 변함없이 사랑해주는…이런 팀 만나는 거 쉬운 일이 아니다. 아, 독일은 그런 분위기가 잘 형성돼있더라. K리그도 본받았으면 하는 점이다. 선수도 잘해야 한다. 난 현역 시절 연봉 더 준다던 팀도 있었지만 인천에 남았다. 혹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아무리 좋은 제의가 와도 무조건 인천에 돌아갈 거다. 난 이게 당연한 것 같은데, 요즘 선수들은 아닌 것 같다. 얼마 전 김봉길 인천 감독님을 뵈었는데, 젊은 선수들이 내년에 다른 팀으로 떠날 까봐 노심초사하시더라. 난 "정이란 게 있는데 설마 그러겠습니까"라고 했더니 감독님께서 "중용아, 요즘 애들은 예전 같지 않다"하시며 쓴웃음을 지으셨다.[사진=연수 기간 직접 작성한 훈련 일지와 브레멘 코치 계약서]
긴 인터뷰 동안 많은 얘기를 들려줘서 즐거웠다. 끝으로 지도자로서 목표가 있다면소위 말하는 힘든 상황에서도 인천이 나를 믿고 공부할 기회를 줬다. 나도 인천을 더 좋은 팀으로 만들고 싶어 독일로 갔다. 잘 배우고 돌아와 내 모든 걸 인천에게 돌려줄 것이다. 프로 선수들은 물론 유소년 팀을 가르치는데 있어 독일 축구의 여러 장점을 접목시키고 싶다. 뿌리부터 배워서 뿌리부터 좋은 팀을 만드는 게 가장 큰 목표다. 나아가 선수들과 융화될 줄 알고, 믿음을 줄줄 아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전성호 기자 spree8@정재훈 사진기자 roze@<ⓒ아시아경제 & 스투닷컴(stoo.com)이 만드는 온오프라인 연예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