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현
[이코노믹리뷰 이미화 기자]
종합금융회사에서 남부럽지 않은 근무조건으로 일하던 양경모 씨. 15년 간 쉬지 않고 달렸지만 이내 회의감을 느낀다.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자 해서 과감히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아이들과 산과 들을 다니던 그는 자연을 가르치는 ‘자연교육가’가 됐다.삼청공원 가득 새소리가 울려 퍼졌다. 간헐적으로 지저귀는 소리가 이어졌지만 새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새 소리를 내는 사람은 찾을 수 있었다. ‘버드콜(Birdcall)’을 손에 든 양경모(54) 씨. 버드콜은 이름처럼 새를 부르는 도구다. 몽땅한 분필 크기인데 양쪽 끝을 비틀면 새소리가 난다. “오늘은 새가 보이지 않네요. 새들도 더우면 그늘을 찾아가거든요.” 햇볕은 강하지 않은데 유난히 땀이 많이 나는 날씨. 양 씨는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떨기나무가 그려진 손수건이었다. 목에는 잠자리 모양의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마 소재의 회색 계량한복 상의에 꽂은 부엉이 장식도 눈에 들어왔다. 그와 공원을 걷기로 했다. “이런 건 관목이라고 해서 잘라주면 더 잘 자라요” 한줄기 삐져나온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치자 양 씨가 말했다. 이따금씩 발에 차이는 작은 열매가 대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건 도꼬마리라고 합니다. 침 끝 부분이 조금씩 휘어진 거 보이시나요? ‘벨크로’의 모티브가 된 열매죠.” 그가 확대경을 꺼내더니 도꼬마리를 보라며 건넸다. 얼마쯤 걷다 자그마한 개울이 있는 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평평한 바위 위에 앉더니 그가 봇짐에서 책을 꺼냈다. 양 씨는 “평소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며 “숲은 책을 읽기에 적격”이라고 했다. 그렇게 그는 숲에서 책을 읽었고, 때때로 자연을 읽어 주기도 했다. 양 씨는 자연교육가다. 그는 1999년도부터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4년 후에는 ‘홀씨’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홀씨는 생태환경교육교구를 개발·유통하는 회사다. 자연을 배우고, 가르칠 때는 꼭 필요한 물품들이 있는데 이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데가 없다는 점에 착안했다. 국내의 경우 연구소 또는 NGO에서 이 같은 교구를 공급하는 곳이 있긴 하지만 회사 형태로는 홀씨가 최초이며 현재까지 유일하다.초등학생 두 아들과 강호지락(江湖之樂)…2막 연 계기양 대표의 첫 직장은 서울의 한 종합금융회사였다.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전공을 잘살려 취직했다. 당시 신의 직장이라 불리던 곳에서 치열하게 일했다. 뭇 직장인들이 그렇듯 집보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때문에 직장은 그에게 또 다른 삶의 터전이었다. 그는 회사라는 공간을 노동에 대한 대가로 월급을 받는 ‘경제활동 현장’ 그 이상으로 여겼다. 적어도 근무 15년까지는 그랬다. “어느 순간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회사에서 제 능력을 발휘할 곳이 별로 없다는 느낌, 뭔지 아시겠어요?” 그렇다고 선뜻 발을 떼기란 쉽지 않았다. 회사를 떠나서 당장 ‘먹고 살’게 정해지지 않은 탓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흘려보내고 조금 남아있던 동력마저 떨어졌을 때 외환위기가 닥쳤다. 양 대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위기를 기회삼아 회사를 떠났다.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눈총은 피할 수 없었다. 아이가 둘인 40대 초반의 가장이 한창 일할 나이에, 게다가 신의 직장이라 불리던 곳을 외환위기에 거처도 없이 그만뒀으니 특히 아내의 반대가 심했다.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잡힌 상태였더라도 안정적인 직장에 머무르라 했을 텐데 이마저도 아니었으니 반대가 심할 만도 했죠.” 구태여 아내를 설득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이해하리라, 생각했다. 그때 그에게 필요한 건 여유였다. 여태 걸어온 길을 한번 쯤 되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1년 동안 그는 삶의 속도계를 살짝 늦춘다.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양 대표는 어린 시절 산과 들을 보며 자랐다. “우리 어렸을 때야 다 그랬죠.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당시 제 아들 둘이 3학년, 5학년이었는데 여유가 있을 때 아이들에게 자연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창 자라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게 미안했던 양 대표는 아이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었다.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그러던 1999년에는 자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주고자 ‘두밀리자연학교’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한 달에 두 번씩 2년 동안 두밀리자연학교를 다녔다. “2년째 접어드는 어느 날이었어요. 아이들에게 자연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보면서 영감을 얻었어요. ‘아, 나도 자연을 가르치고 싶다’라고요. 돌이켜보니 아이들 덕분에 이 일을 하게 된 셈이네요.” 자연교육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후 가장 먼저 해야 한 일은 자연을 배우는 거였다. 지금이야 자연교육가 양성과정만 100개가 넘지만 당시에는 교육받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1998년 모 대학교에서 ‘자연환경안내자’라는 재취업과정이 생긴 적이 있었어요. 안타깝게도 단 한 차례 교육 후 폐강했죠. 근데 이곳 졸업생들이 협회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소식을 듣고 무작정 찾아갔어요.” 한국숲해설가협회의 전신인 자연환경안내자협회였다. 양 대표는 협회 발족 직후 사무국장직으로 지원했다. 무보수직이었다. “협회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고 교육생모집도 했어요. 그리고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양 대표에게 교육 수료 후 처음으로 숲 해설을 나갔던 당시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물고기와 곤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꿰고 있었는데 꽃이나 나무에 대해서는 비교적 서툴렀어요. 보통 해설을 하기 하루 전 그 지역 답사를 가는데요, 동선 따라 걸어가면서 무작정 외운 다음 관람객들에게 전달했어요. 무식이 용감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딱 그거였죠.” 그는 한 달에 두어 번은 강원도 소재 산림청 휴양림에서, 그리고 의뢰가 들어오면 방방곡곡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숲을 설명했다. 양 대표는 “자연경관을 감상하면서 자연을 알아가고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 자체가 축복이었다”고 회상했다. 재정난 부딪치자 아이템 ‘번뜩’, 교구회사 없는 데 착안 그가 말한 ‘축복’은 매년 3월부터 11월까지만 이어졌다. 한겨울에는 일거리가 없었다는 얘기다. 숲은 겨울에 잠들기 때문이다. “일은 재미있었죠. 근데 쉽지만은 않더라고요. 업(業)으로의 영속성이 과연 있나 싶었어요. 딜레마였죠. 좋아하는 일이긴 한데 재정적으로 안정성을 보장해 주지 않으니….”